+ 합작을 볼 수 있는 주소는 이 쪽 -> 이었는데 너무 오래되어 사라진 모양입니다...ㅠㅠㅠㅠㅠ
+ 뱀파이어&신부 두 소재 다 쓰려고 했는데 글이 너무 길어져서 뱀파이어만 쓴 분량까지 올립니다.
+ 합작을 열어주신 스란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Lancelot/Percival
침묵
w. Edyie
퍼시벌은 갑작스레 찾아든 기척에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잠이 덜 깬 상태였지만 그는 재빨리 상체만 일으켜 움직임이 느껴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직 채 사그라들지 않은 햇볕 탓에 퍼시벌은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나서야 시야를 되찾았다. 그의 잠을 방해한 불청객은 여유롭게 창가에 서서 바람에 살랑이는 커튼 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퍼시벌의 표정은 반대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세상에, 퍼시벌. 자네 취향이 독특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심한데."
"그런 말 하려고 찾아왔으면…."
"지금 난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겠거든."
아슬아슬하게 그늘과 햇볕의 경계에 서 있던 제임스는 말을 끊으며 퍼시벌과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퍼시벌이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허공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그늘에 숨어있던 하얀 손이 주홍빛 저녁 햇살과 닿자마자 순식간에 살이 타들어갔다. 고약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퍼시벌에게 덮쳐올 때까지도 제임스는 그저 표정의 변화 없이 마주친 눈을 깜빡이고만 있었다.
오히려 놀란 쪽은 퍼시벌이었다. 퍼시벌은 눈을 부릅뜨더니 햇살을 가로질러 제임스에게 달려들었다. 짧은 순간 폭발적으로 움직인 탓에 둘은 되는대로 뒤엉켜 바닥을 굴렀다. 나무로 만들어진 바닥이 요란하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울어댔지만 어느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대신 둘의 반응은 판이하게 달랐다. 뒹군 자세 그대로 늘어진 제임스와 달리 퍼시벌은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누운 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제임스는 느긋하게 자신을 붙든 퍼시벌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칠 뿐이었다. 그 바람에 퍼시벌의 시선이 짧은 순간 빗겨져 나갔다. 그는 시선 끝에 걸린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정신 나갔어?' 그렇게 외치려던 퍼시벌은 운도 떼지 못한 목소리를 집어삼켰다. 옷깃을 쥔 퍼시벌의 손도, 그 위에 올려진 제임스의 손과 마찬가지로 까맣게 타들어간 채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의지나 고통과는 전혀 상관없는 현상이 그의 기분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퍼시벌은 잠시 멈추었던 숨을 들이쉬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제임스는 일그러진 퍼시벌의 손등과 표정을 잃은 얼굴을 번갈아보다 고개를 숙였다. 제임스의 입술은 녹아내린 상처를 피해 퍼시벌의 손 위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하고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퍼시벌은 진득하게 닿는 시선을 피해 눈꺼풀을 감아내렸다. 그는 그대로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보고 확인하지 않아도 쫓아오는 제임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퍼시벌은 한참을 그대로 서 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제임스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그를 보고 올려다보고 있었다.
늘 이런 패턴이었다. 제임스는 언제나 대답을 원하는 눈빛이었지만 퍼시벌은 그 때마다 대답을 미루었다. 대답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제임스가 무엇을 묻는 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평소에는 가볍고 시끄러운 사람마냥 굴지만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는 말을 아끼는 제임스의 성격을 알았기에 일찍이 직접 물을 생각마저 접었다.
때때로 '어쩌면, 어쩌면 오늘은.' 하는 생각이 함께 해온 오랜 세월 사이에 몇 번이나 찾아왔지만 퍼시벌은 그 때마다 물어보지 못했다. 할 말은 입 안에 너무 오래 담아두고 있으면 잊어버리기 쉬웠다. 그는 이미 자신이 물었어야 할 질문을 잊어버렸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퍼시벌은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 생각 탓에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입은 열었으나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 지,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 생각이 방향을 찾는동안 그는 시선을 내리깔고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하아. 짤막한 한숨이 뒤엉킨 생각들 사이를 휘젓고 내뱉어졌다.
그제야 제임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치는 바람만큼이나 부드러운 동작으로 일어선 그는 제 옷 매무새보다도 퍼시벌을 먼저 챙겼다. 제임스는 손을 뻗어 흐트러진 퍼시벌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쓸어넘겼다. 퍼시벌은 고개를 들고 제임스와 마주보았다. 슬쩍 휘어진 눈꼬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던 퍼시벌은 마침내 생각의 방황을 마치고 제가 해야할 질문을 골라냈다.
"제임ㅅ…."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퍼시벌의 턱을 어루만지던 제임스가 그대로 그를 끌어당겼다. 커다랗게 떠진 퍼시벌의 눈에는 한순간 제임스만이 가득 들어찼다. 코 끝을 스치는 감촉을 끝으로 퍼시벌은 눈가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제임스의 입술이 겨우 입을 뗀 퍼시벌의 입술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새어나왔던 목소리는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클레어는 그렇게 소리 높여 외치고는 성큼성큼 앞서가는 남자를 따라 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알렉스는 이제 막 베가에 돌아온 참이었다. 그리고 방금 베가의 높은 성벽과 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으로부터 얼마 전 있었던 커다란 '사건'에 대해 전해들었다. 그 소식 때문에 돌아오신 거 아니세요? 경비병의 말을 들은 뒤로 제대로 된 기억이 없었다. 알렉스는 그 길로 무작정 뛰어들어와 클레어를 찾았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베가의 수장이 된 클레어는 회의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던 길에 알렉스와 마주치고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반갑다거나 어떻게 지냈냐는 인사보다도 먼저 나온 미카엘의 안부에 그녀는 말을 흐렸다. 알렉스는 다급한 마음에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지만 불안한 눈빛만 돌아올 뿐이었다. 알렉스는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그 뒤로 이러한 상황이었다. 알렉스는 미카엘이 있을 법한 장소는 전부 돌아다니며 그를 찾아다녔다. 결국 주변의 보고를 받고 다시 나타난 클레어가 손을 붙잡기 전까지 알렉스는 베가에 존재하는 모든 문을 여닫을 기세였다. 클레어는 빠져나가려는 그의 손을 꼭 붙잡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알렉스. 미카엘은 죽었어."
"날개로 총알도 막던 대천사야. 대체 어떻게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가 나와?"
"...사실이야. 화장터에 가봐."
이번에는 알렉스가 뭐라 덧붙이기도 전에 클레어가 먼저 돌아섰다. 그녀는 그의 손을 놓은 뒤,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화장터. 지프가 죽은 뒤로 찾은 적 없던 곳이었다. 지프를 화장할 당시에도 그는 그저 멀리서 지켜봤을 뿐이었다. 자신을 키워주지 않았던 아버지. 알렉스가 베가를 떠나기 직전에 찾아와 모든 것을 뒤엎은 그에게 어떻게 작별해야 할 지 몰랐던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카엘이라고 했다.
천사들과의 오랜 전쟁을 이어가는 동안 미카엘이 부상을 입은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치명상을 입은 건 얼마 전에 있었던 퓨리아드와의 전투에서 입었던 게 처음이었다. 베가에 사는 사람들과 알렉스는 자연스럽게 그를 '다쳐서 피는 흘릴 지언정 죽지 않는 존재'처럼 여기고 있었다. 누구도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건 기정화된 사실처럼 베가를 떠돌았다. 그런 그에게 죽음이라는 단어를 붙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알렉스는 화장터를 향해 걷는 내내 소문을 부정했다.
그러나 그가 본 현실은 소문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정갈하게 쌓아올린 나무기둥들 위로 익숙한 코트자락이 펄럭이는 모습을 보자 알렉스는 그 자리에 멈춰서버렸다. 슬픔이나 애도의 마음이 아니라 허탈함이 그를 쥐고 흔들었다.
미카엘이 자신의 옆에 노마를 '친구'로 붙여놨던 것부터 시작하여, 가브리엘을 만났을 때 죽일 수 있겠냐는 질문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던 일까지. 신뢰란 꽤나 유리와 닮아있어서 한 번 금이 가기 시작하면 깨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미카엘과 알렉스의 관계 역시 그러했다. 미카엘은 언제나 말을 아끼는 편이었고, 필요 이상의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알렉스는 그런 미카엘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그가 베카의 숨통을 끊고 달아나다시피 사라지는 모습을 본 이후 홀로 베가를 떠났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들은 어디까지나 알렉스 나름대로의 정리를 위해서였을 뿐, 이런 결과를 바란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알렉스는 쌓아올려진 통나무를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새카만 어둠 사이로 며칠 전부터 그를 괴롭혔던 악몽이 다시 한 번 생생하게 그려졌다.
알렉스의 꿈 속에서 미카엘은 베가의 하늘을 가로질러 날고 있었다. 바다와 맞닿은 어느 곳에서 신을 찾으며 괴로워하던 대천사는 새카만 날개를 펼쳐 베가로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오자마자 그를 향해 날아드는 자잘한 화살들을 보고 눈을 번뜩였다. 미카엘을 공격한 이는 다름 아닌 그가 지켜오던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베카의 죽음을 알았고,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인 미카엘을 적으로 간주했다. 미카엘은 잠시 허공에서 멈칫하더니 최대한 방어하는 자세로 그가 지키던 도시를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곧 창 하나가 날아들어 그의 날개 하나를 찢어놓았다. 미카엘은 고통스런 얼굴로 추락하며 날개에 박혀든 창 끝을 살폈다. 천공의 철. 그의 상처에서 회수하였던 조각은 다시 그의 날개를 찢는 데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미카엘이 자세를 바로하려 몸을 펴는 순간, 그의 가슴을 관통하며 창 하나가 박혀들었다. 미카엘은 날개짓을 멈춘 채 허공에서 머물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제대로 내쉬어지지 않는 숨을 겨우 붙들며 미카엘은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는 자신의 가슴 앞으로 튀어나온 창 끝을 매만지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마치 꿈을 꾸는 알렉스와 마주한 사람처럼 허공을 향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알렉스. 그 말을 끝으로 미카엘은 눈을 감았다.
꿈은 거기서 끝이 났다. 알렉스는 자신이 꾸었던 꿈이 정말로 미카엘의 죽음을 보여준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미카엘이 부상을 입었거나 곤경에 처했을 거라고. 그럼에도 모든 일은 미카엘이 바라는 대로 끝났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의 결과는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알렉스는 혼란스러운 생각을 갈무리하며 천천히 눈을 뜨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자주 보아왔던 뒷모습이 그가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느껴졌다. 미카엘, 어째서.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삼키며 알렉스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는 애도를 표할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미카엘의 장례가 이렇게 끝날 거란 사실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미카엘이 그동안 베가를 지켜준 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이렇게 형식만 갖추었을 뿐, 바람에 쓸려가라고 방치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알렉스는 미카엘을 이대로 둘 수 없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 타오를 만한 물건에 불을 붙여 켜켜이 쌓인 통나무들 사이로 밀어넣었다.
가장 밑바닥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은 순식간에 옮겨붙어 위로 타고 올랐다. 알렉스는 느린 걸음으로 물러나며 불꽃이 미카엘에게 옮겨붙는 모습을 응시했다. 미카엘의 옷자락부터 그의 몸이 온통 화염에 뒤덮일 때까지 알렉스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노랗고 붉은 빛깔로 타오르던 불길이 끝끝내 미카엘의 얼굴을 덮는 순간, 아래에 쌓여있던 통나무들이 순식간에 물감이 번지듯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파스스 무너져내렸다. 알렉스가 미처 상황을 확인할 틈도 없었다. 고요히 허공에 떠오른 잿가루들이 뿌옇게 시야를 가로막았다.
알렉스는 잿가루들이 가라앉을 때까지 선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참만에 겨우 맑아진 시선 끝에 흐릿한 인영이 들어왔다. 타오르던 불꽃을 집어삼킨 마냥 빛을 뿜으며 길게 뻗은 형체에게서 검은 날개가 뻗어나왔다. 뒤이어 날개가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일어난 돌풍이 남아있던 잿가루를 멀리 날려보냈다. 그제서야 알렉스는 눈을 크게 뜨고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 광경을 눈에 담으며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아아. 부르고 싶은 이름 대신 신음 섞인 울음이 터져나왔다. 알렉스는 주먹을 움켜쥐고 소리를 집어삼키려 노력했다. 눈물로 얼룩진 시야 사이로 빛이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알렉스는 크게 숨을 들이키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마침내 또렷이 드러난 형체의 눈꺼풀 아래로 빛이 사그라들고 익숙한 녹빛 눈동자가 반짝였을 때, 알렉스는 쓰러지듯 몸을 웅크렸다. 천사가 줄곧 바라보았던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에게 감사하다고 기도했다. 긴 잠에서 깨어난 미카엘은 들려오는 기도소리에 엷게 웃으며 걸음을 떼었다. 아이의 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새벽을 적시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나지막히 흙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겨우 선잠이 든 귓가에 박혀드는 바람에 브랫은 미간을 좁혔다. 성가신 버릇이지만 고칠 방법이 없었다. 소년에게는 비를 멈출만한 능력이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빗소리를 무시할 만큼 청력이 둔감한 편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비오는 밤에는 꼭 한 번 눈을 떠야만 다시 잠들 수 있었다. 눈을 뜨지 않고 버티다가는 되려 아침이 올 때까지 잠들 수 없는 꼴이 나버렸다. 브랫은 점점 또렷해지는 정신을 느끼며 느리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흐릿했던 시야에 익숙한 천장이 들어올 때까지 가만히 누워있다가 슬쩍 고개만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다른 글레이더들은 전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바로 옆 해먹에 자리잡은 레이는 잠버릇 탓에 벌써 반쯤 걸쳐진 상태였다. 저렇게 자놓고는 또 아침부터 어깨가 아프다느니 목이 뻐근하다느니 징징거리지. 망할 잠버릇 좀 고치라고 말을 해도 들어먹을 생각은 없을테고. 브랫은 고개를 작게 내저으며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지만, 브랫이 글레이드에서 제일 키가 큰 소년이었던 탓에 삐걱대는 소리가 짤막하니 울려퍼졌다. 브랫은 해먹에 뭉개듯 대충 몸을 묻으며 빗소리를 들었다.
톡톡톡. 한참동안 귓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빗소리 뿐이었다. 다른 소년들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누워있지만 한 번 깨버린 잠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엔 이렇지 않았다. 소년이 글레이드에 들어온 때, 그보다 조금 지나서까지도 빗소리에 잠이 깨는 일은 없었다. 빗소리에 예민해진 건 순전히 후천적인 탓이었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해도 얼굴을 마주치면 아직도 이따금씩 선명한 기억이 겹쳐졌다가 사라졌다. 환상은 글레이드에서 단련된 소년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도 남을 만큼 강렬했다. 기분이 어땠는지, 정신없이 파고 들던 소리와 손에 닿았던 감촉마저 전부 생생할 정도였다. 브랫은 생각을 덜어내려 애쓰다가 느즈막히 눈을 감았다. 눈 앞에 섬광처럼 번쩍인 영상 탓이 아니었더라면 다시 눈을 뜰 일이 없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늘도 길게 늘어진 기억의 잔상이 브랫을 붙들었다.
브랫은 잠깐동안 숨을 참았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어깨도 숨을 따라 느리게 들썩였다. '젠장. 그냥 내 말 들어!' 절규에 가까웠던 외침이 빗소리와 뒤엉켜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브랫은 작게 욕을 내뱉고 눈을 질끈 내려감았다. 다행스럽게도 다시 잠들 때까지 브랫을 괴롭히는 기억은 나타나지 않았다. 내일 뛰어야 할 구역이 어디였더라. 생각을 갈무리하던 소년은 빗소리를 잊은 채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었다. 글레이드는 여전히 시퍼런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이었다.
* * * * *
네이트가 눈을 크게 부릅 떴다. 브랫이 글레이드에 들어와 1년 하고도 반 년에 가까운 시간을 지내면서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익숙한 눈동자에는 낯설게도 다급함이 서려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비쳐진 두려움을 마주할 때에야 브랫은 일이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제 등 뒤에 무언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확인할 필요는 없었지만 브랫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말하면 몸을 움직이기 위해 어깨를 조금 달싹였을 때, 미로 가득히 목소리가 메아리 쳤다.
"뛰어, 브랫! 뛰라고!"
평소와 다르게 터지듯 내지른 목소리와 기괴한 울음소리가 동시에 브랫을 덮쳤다. 막 돌아서려던 브랫은 재빨리 시선을 바로잡으며 바닥을 박차고 달려나왔다. 뒤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느낌과 역겨운 냄새가 단번에 어깨를 넘어 브랫을 앞질렀다. 벽을 긁는 금속성 마찰음이 점점 가깝게 들려오자 마주 서 있던 네이트는 팔을 멀리 뻗어 들고 있던 장대를 브랫의 뒤쪽으로 집어던졌다.
언제나 이런 상황은 예상하고 있었다고 믿었지만 예상과 현실의 격차는 생각했던 것보다 벌어져 있었다. 갑작스런 변화에 침착했던 두 소년이 한꺼번에 페이스를 잃었다. 뛸 때에는 오직 미로만 떠올리고 다른 건 잊어. 우린 꼭 돌아와야 하니까. 출발 전 단정한 얼굴로 말했던 네이트가 팔을 휘돌리며 브랫을 재촉했다. 모든 게 생경한 풍경 가운데 익숙한 모습이라고는 주변을 높게 둘러싼 빌어먹을 미로 뿐이었다. 브랫은 내딛는 발에 힘을 주었다. "브랫-!" 귓가를 먹먹하게 만드는 고함과 소름 돋는 울음소리가 뒤엉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머릿속을 서서히 물들이는 공포가 집중력을 흐트러뜨렸지만 브랫은 시야에 들어온 네이트의 손을 바라보며 달렸다.
초조한 얼굴로 끝없이 그를 격려하던 네이트가 표정을 바꾼 순간과 브랫이 등 뒤에 느껴지는 질척한 액체를 느낀 건 거의 동시에 가까웠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감각에 브랫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반쯤 돌렸다. 전체가 보이지 않았지만 시선 끄트머리에 들어온 '괴물'의 모습은 발을 멈추게 만들었다. 새빨간 빛이 무척이나 가까운 거리에서 반짝였다. 끝이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입에서 신음에 가까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아. 눈을 깜빡이는 찰나가 그토록 길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눈꺼풀이 전부 들리기도 전에 브랫의 어깨를 잡아채는 손길이 느껴졌다.
"브랫!"
네이트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파고들자 브랫은 눈을 크게 떴다. '어째서?' 바보같은 질문을 하기도 전에 네이트는 브랫을 밀치고는 다른 손에 쥐고 있던 장대를 두 손으로 단단히 움켜쥐었다. 장대 끝은 망설임 없이 그리버의 머리 아래로 찔러넣어졌다. 아까보다 더 높아진 울음소리가 미로를 뒤흔들었다. 네이트는 얼른 장대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고통에 몸부림 치던 철제다리가 요란하게 바닥을 긁다가 곧 잠잠해졌다. 두어번 눈을 깜빡이며 그리버의 움직임을 살피던 네이트가 얼른 뒤로 돌아 브랫을 바라보았다. 소음이 사라진 미로를 간신히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대신했다. 네이트는 더러워진 손바닥 대신 비교적 깔끔한 손등으로 식은땀이 배어나온 이마를 대충 훔쳤다. 그리고 브랫을 향해 터덜터덜 느린 걸음을 옮기며 손을 뻗었다. 브랫은 엉거주춤 바닥에 손을 짚고 일어나려다 말고 네이트 너머에 늘어진 그림자에 시선을 두었다. 네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입을 떼었다.
"뭘 꾸물대고 있어. 어서 일어…."
"네이트, 뒤!"
키에에엑! 브랫의 외침이 울음소리에 파묻혔다. 마주 보던 네이트가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철제 다리가 바닥에 불꽃이 일도록 긁더니 멀지 않은 거리에 있던 네이트의 다리를 잡아채었다. 네이트가 바닥으로 고꾸라지자 그리버는 자리에서 일어나 넘어진 소년의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시커먼 그늘 아래 삼켜진 네이트가 상황을 판단한 때는 그리버의 몸체에서 뻗어나온 날붙이가 그의 다리를 난도질 할 때 즈음이었다.
저들끼리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던 날붙이는 가차없이 네이트의 다리 부근을 그어댔다. 글레이드에서 입고 나온 낡은 바지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찢어졌다. 금세 드러난 다리 위로 상처가 연달아 생기며 붉은 피가 터졌다. 네이트는 다리를 비틀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브랫은 자리에서 튕겨지듯 일어나 그리버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멈춰섰다. 바닥에 흘러내리기 시작한 새빨간 피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가 또다른 소음이 되어 귓가에 웅웅거렸다. 공포에 사로잡혀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동안 간신히 들어올린 손이 눈에 띄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열 걸음. 결코 안전한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리버는 붙잡은 네이트 외에는 관심이 없어보였다. 떨어진 거리에 선 자신도 이토록 두려운데 아까 네이트는 어떻게 했더라. 브랫을 구하겠다고 그리버의 턱 바로 밑까지 파고들었던 소년이 저 괴물의 아래에 있었다. 거기까지 떠올린 브랫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고 애써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눈을 깜빡인 뒤에야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브랫은 네이트가 꽂은 그대로 박혀있는 장대를 발견하고 달려나갔다. 그리버가 네이트에게 집중한 사이, 장대 손잡이를 붙잡은 브랫이 체중을 실어 장대 끝을 뒤틀어 다시 찔러넣었다. 그리버는 고통보다 분노에 가까운 울음을 토해냈다.
귀가 먹먹해지는 기분이 들 즈음 브랫은 얕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손을 떼자마자 날아든 단단한 꼬리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브랫의 몸은 아까 그가 출발했던 곳보다 조금 떨어진 곳으로 곤두박질쳤다. 브랫은 온 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에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도 딱딱한 돌바닥을 움켜쥐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흉물스럽게 생긴 괴물은 자리를 빙글 돌더니 브랫을 향해 꼬리를 치켜들었다. 채찍마냥 뒤로 넘어갔다 빠르게 앞으로 돌아온 꼬리 끝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려왔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그 끝에서 뾰족하고 기다란 바늘이 돋아나는 모양이 보였다. 브랫은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그에겐 저 바늘을 막을 만한 방어구나 무기가 없었고, 도망치기에도 타이밍이 이미 너무 늦었다. 그렇다면 저 바늘은 어디를 뚫어놓을 것인가. 머릿속은 비극적인 상황 탓에 그들을 둘러싼 미로만큼이나 복잡하게 엉켜버렸다.
금방이라도 몸을 들쑤셔 놓을 듯한 기세로 공중을 떠돌던 바늘이 브랫을 향해 다가왔다. 무거운 철제 다리에 바위가 불꽃을 내며 우는 소리가 반복되고 점점 거리가 좁혀졌다. 바닥을 떠받힌 손과 엉덩이가 들썩거리며 물러났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공포에 덜덜 떨리는 손이 본능적으로 몸을 감싸안자 무게중심이 뒤로 무너져 시야가 허공을 향했다. 브랫은 두 눈 가득히 괴물의 흉측한 얼굴을 담으며 숨을 멈추었다.
삐익. 그 때, 귀를 찢을 듯이 높은 소음이 짤막하니 들렸다. 브랫은 그 소리가 죽기 전에 듣는 환청이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그가 기다렸던 가슴을 꿰뚫는 소리 역시 들리지 않았다.
그리버는 잠시 자리에 멈춰서는가 싶더니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브랫이 덩달아 반대편으로 물러났지만 소년을 쫓는 움직임은 없었다. 한껏 품었던 숨이 그제야 터져나와 조용한 미로에는 브랫의 가쁜 숨소리만 맴돌았다. 조심스레 내쉬는 숨소리가 세 번이 되기도 전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버는 마치 두 소년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뒷걸음질 치더니 결국은 뒤로 돌아 높다란 벽을 타고 사라졌다.
브랫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그리버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즈음에야 퍼뜩 고개를 들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나 몇 걸음 뗀 자리에 네이트가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있었다. 허벅지부터 무릎이며 종아리를 가릴 것 없이 생겨난 자상에서 새빨간 핏줄기가 흘러내렸지만, 어디에도 찔린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브랫은 네이트의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바짓단 중 가장 깨끗한 부분을 힘주어 뜯어냈다. 찢겨진 천조각을 가장 상처가 큰 허벅지에 대고 단단히 동여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길게 뻗어 이어진 길을 살피던 시선이 다시 네이트로 향했다.
브랫은 바닥에 축 늘어진 팔을 제 어깨 위로 두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을 잃어버린 다리와 두 사람의 무게 탓에 일어서자마자 휘청였지만 그는 억지로 버티며 발걸음을 떼었다. 가자. 브랫은 가쁜 숨을 내뱉기 바쁜 입 안으로 소리를 삼켰다. 길이 멀지는 않았지만 혼자 둘 몫을 걷기엔 벅찬 길이었다.
해가 지기까지 얼마나 남았는 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미로에서 밤을 새는 일은 겪고 싶지 않았다. 브랫의 머릿속에 그들이 들어왔던 미로의 입구와 가장 가까운 경로가 펼쳐졌다. 상황은 좋지 않아도 착실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두 소년에게 꽤나 도움이 되었다. 몇 번 방향을 돌린 후에야 마주한 미로의 끝에서 브랫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입구 너머로 글레이드가 어렴풋이 보였다. '네이트, 나한테 고마워 해야할 거야.'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러기엔 기력이 부족했다. 브랫은 부축에서 언제부턴가 반쯤 끌려온 모양새가 된 네이트를 다시 고쳐안았다. 그리고 스산한 바람이 불어닥치는 미로를 겨우 두어발 빠져나오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해가 지는 모양을 보니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그래도 돌아왔다.
"브랫!"
귓가에 반가운 마이크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브랫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들의 등 뒤로 닫히기 시작하는 미로가 묵직한 소리를 냈다. 브랫은 문의 경계에 걸친 네이트의 몸을 글레이드 안 쪽에 내려두고 달려온 마이크를 쳐다보았다. 제 몰골이 말이 아닌 모양인지 말을 걸려던 마이크가 브랫의 이름을 부르다 말을 멈추었다. 브ㄹ….
가까이서 들리던 목소리가 멀어지고, 시야가 뱅글 돌았다고 생각할 무렵 브랫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머리에 아릿한 충격이 느껴진 건 다음 문제였다. "다들 얼른 나와! 러너가 돌아왔어!" 시끄러운 외침을 들으며 브랫은 정신을 잃었다.
소년들은 다시 글레이드로 돌아왔다.
* * * * *
시야에 들어오는 탁한 색깔들이 뒤엉켜 어지럽게 번져나갔다. 브랫은 눈꺼풀을 들어올리자마자 시작된 정신 사나운 광경에 도로 눈을 감았다. 며칠을 누워 있었는지 평소처럼 벌떡 일어날 힘이 없었다. '일어났다고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데.' 브랫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소년들이 글레이드에 마련한 의료실에는 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구조였지만, 적어도 낮과 밤은 구분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브랫이 눈을 뜬 건 애매한 시점이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쉬었던 눈이 제기능을 발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빛이 들어왔다. 브랫이 희미한 빛을 가늠하며 시간을 잠시 고민할 때 즈음에야 시야가 제대로 돌아왔다. 브랫은 누운 자세로 서두르지 않고 감각들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서서히 귓가에 빗소리가 들려오고, 이어서 흙냄새가 코 끝에서 터진 것처럼 한번에 느껴졌다. 신중한 소년은 옷 위에 올려진 손가락을 까딱이며 시간을 재고 느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기를 반복하다가 현기증이 가라앉자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가 누워있던 딱딱한 침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른 저녁이라면 시끌벅적할 글레이드가 이따금 바람과 빗방울에 사박거리는 풀소리, 이따금 찰박이는 물소리를 빼면 남는 소리가 없을 만큼 적막했다. 작게나마 웅성거리는 소년들의 목소리는 모두 숨어있었다. 브랫은 지금이 새벽녘일 거라 추측했다. 글레이드의 모두가 잠든 시간. 조금 더 있으면 미로의 문이 열리고, 러너들이 달려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일어날 시간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브랫은 번개라도 맞은 사람처럼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러너. 미로. 네이트. 브랫은 바로 옆 침대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거리에 놓인 나무침대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의료실에는 브랫 혼자 뿐이었다. 네이트는 어디 있지? 불안감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브랫이 기억하는 네이트의 모습은 지금 의료실에 누워있어야 마땅한 부상을 가지고 있었다. 난도질 당한 다리에서 흐르던 새빨간 피와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번갈아가며 눈 앞에 아른거렸다.
설마. 브랫은 마른 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안한 상상따위는 그가 상황을 파악하는 데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침대 아래에 놓인 신발을 찾아 신고 바닥에 내려서자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찌르르한 통증이 타고 지나갔다. 휘청이는 몸을 버티고 선 브랫이 느리게 의료실 문을 밀었다.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사이로 촉촉히 젖은 땅이 눈에 들어왔다. 흙바닥 위에는 무언가 끌린 흔적이 남아있었다. 브랫은 이어진 흔적을 따라 시야를 옮기다 잠시 숨을 멈추었다. 어둑한 어둠 사이로 시커먼 형체가 비를 맞으며 바닥에 웅크려 있었고, 브랫은 한 눈에 정체를 알아보았다. 브랫은 다가가는 대신 나지막히 이름을 불렀다.
"…네이트."
"……."
대답 대신 네이트는 제자리에 멈춰섰다. 후우후우. 숨을 고르며 들썩이는 어깨가 제법 떨어진 브랫의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브랫에게 등을 진 채로 앉아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브랫은 문가에 선 채로 대답을 기다렸다. 거칠던 숨소리가 안정될 즈음에야 네이트가 입을 열었다.
"도와줘, 브랫." 힘에 부쳤는지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피곤을 담고 갈라져있었다. 브랫은 빗 속으로 걸음을 내딛고 네이트의 곁으로 다가가 그를 부축하기 위해 몸을 숙였다. 이미 흠뻑 젖은 옷이 근육이 빠지기 시작한 팔다리에 늘러붙어 있었고, 허벅지에 감긴 붕대 사이로 시커먼 핏기가 돌았다. 브랫은 얼마나 빗속에 있었느냐 물으려던 질문을 삼켰다.
브랫이 자신을 향해 뻗어진 팔을 어깨에 두르고 다리에 힘을 주어 일으키자 네이트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나왔다. 가뜩이나 성하지 않은 몸으로 네이트를 부축하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브랫은 자세가 무너지기 전에 네이트가 깔고 앉아있던 다리를 펼 수 있게 도와주고 제자리에 앉혔다. 네이트는 잇새로 새어나가는 신음을 참으며 붕대 쪽으로 손을 뻗었다. 상처가 터졌는지 젖은 붕대 위로 피가 번져나갔다. 브랫은 놀란 눈으로 네이트를 바라보았다.
당장 네이트에게 필요한 건 의료팀의 응급처치라고 생각한 브랫이 모두가 잠든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일어섰다. '로버트를 불러올게.' 브랫은 머릿속에 담긴 말을 채 꺼내보지도 못하고 갑자기 붙잡힌 팔을 돌아보았다. 자국이 남을 정도로 팔을 억세게 쥔 손이 아이러니하게도 파르르 떨렸다. 희미한 빛 사이로 보이는 보랏빛 입술이 달싹였다.
"날 구덩이로, 데려다 줘."
"뭐?" 브랫은 한 대 얻어맞은 사람과 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항상 제대로 된 말을 늘어놓는 네이트의 말이 맞는 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네이트는 고개를 숙인 채 도리질치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대로는 너무 늦어. 다들 일어나기 전에-"
"거긴 감옥이잖아. 거길 네가 왜 가."
"…우선 데려다 줘."
"네이트."
"브랫. 시간이 없어."
"젠장. 그냥 내 말 들어!"
브랫은 잡고 있던 팔을 털어내고는 네이트의 어깨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젖은 옷감이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시선을 내리깔던 네이트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브랫을 올려다보았다. 얼굴을 마주보았다고 생각하자마자 브랫의 손목에 네이트의 손이 감겨왔다. 눈빛과 손을 타고 전해지는 힘에 브랫은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었다.
불안과 두려움이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브랫이 몇 번 마주한 적 있었다. 그리버에게 찔려 미로로 강제추방 당했던 글레이더들이 몇 명인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그 중에 살아돌아온 소년은 한 명도 없었다. 강제적으로 글레이드에서 격리된 소년들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다가올 결정을 미리 깨닫고 똑같은 눈빛을 떠올렸다.
그 눈빛을 네이트가 하자 브랫은 맥이 풀렸다. 반면, 네이트는 더 절박한 눈빛으로 미끄러지는 브랫의 팔을 붙잡았다. 제대로 힘을 조절하지 못한 탓에 바르르 떨리는 손이 도망치려는 브랫을 옭아매었다.
이건 룰이잖아. 짤막하게 덧붙는 말이 한없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글레이드에 정해진 규칙은 적지 않은 죽음과 사고를 겪으며 하나 둘씩 쌓아올린 결과였다. 그 중에 그리버에게 찔려 변이가 시작된 글레이더를 어떻게 해야하는 지도 정해져 있었다.추방 전까지 구덩이에 가둔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 지켜지는 규칙 중 하나였지만 브랫은 부정했다.
절박한 눈빛을 피한 시선이 붕대 아래 감춰진 다리로 향했다. 상처부위가 넓었던 만큼 허벅지부터 무릎께를 감은 붕대 아래로 드러난 다리에는 어떠한 징조도 나타나지 않았다. 브랫은 증거도 없이 상처를 입었다는 이유로 그를 구덩이에 가둬야 하는 지 고민했다.
파랗게 질린 입술이 작게 달싹거리며 브랫을 설득했다. 브랫. 불리는 이름이 제 것임에도 낯설게 들려왔다. 브랫은 다물린 입술에 힘을 주었다. 네이트에게서 넘어온 감정이 뒷목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외면하기에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였다. 브랫은 눈을 감고 낮은 한숨을 토해냈다.
네이트는 말이 없었다. 대신 브랫이 눈을 뜨기 직전, 그 짧은 사이에 손을 뻗어 브랫의 어깨 위에 두었다. 다독이는 손길이 차디찬 비 때문인지 따스하게 느껴져 브랫은 상체를 웅크렸다. 미로에서 그를 구해주었던 네이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비참한 기분이 다 낫지 않은 몸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그를 이렇게까지 내몰았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울컥 치고 올라왔다. 브랫은 천천히 네이트의 등 뒤로 팔을 뻗어 며칠 새에 야윈 몸을 감싸안았다. 의젓한 소년은 브랫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기댈 수 있게 품을 열어주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브랫, 괜찮아."
밀려난 손으로 등을 토닥이던 네이트가 브랫을 떼어내며 덧붙였다. 다시 마주친 시선에는 브랫이 늘 봐오던 눈빛을 가진 소년이 자리했다. 브랫은 눈을 두 번 깜빡이는 동안 마음을 굳혔다. 그는 네이트가 바라는 대로 도와줄 생각이었다. 네이트를 구덩이에 데리고 가겠지만, 그건 추방을 준비하는 기간이 아닐 것이다. 밑바닥에 깔려있던 불안감이 확고한 믿음으로 바뀌었다. 변화는 여태까지 그를 이끌었던 눈빛에서 시작되었음을 브랫도 알고 있었다.
브랫이 먼저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혼자 일어서기가 힘들었는 지 네이트는 뒤척이다가 브랫을 올려다보았다. 허공으로 떠오른 손을 붙잡은 브랫이 맞잡고 힘을 주었다. 숙여진 고개를 네이트의 팔 아래로 밀어넣으며 허리를 세우자 둘은 완전히 일어섰다.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두 소년은 누가 뭐라하기도 전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서서히 약해진 빗줄기와 구름 사이로 희뿌연한 햇볕이 비쳤다. 글레이드에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 * * * *
"브랫. 일어나."
익숙한 목소리가 나지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늘을 그리며 내려앉은 손이 어깨를 움켜쥐고 흔들었다. 강하진 않지만 해먹을 흔들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제대로 눈이 떠지지 않아 브랫은 일단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브랫은 먼저 손을 뻗어 해먹을 붙잡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제야 눈꺼풀 위로 엷은 햇살이 주홍빛으로 번쩍이며 들어왔다. 브랫은 시린 눈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손바닥 안으로 얼굴을 묻고 마른 세수를 했다. 여전히 햇볕은 부담스러웠지만 지체할 만큼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브랫은 느리게 눈을 뜨며 옆에 선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소년이 햇살을 등 지고 자리한 탓에 서 있는 이의 얼굴을 확인하는 데까지 한참이 걸렸지만, 브랫은 이미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봄은 나른한 계절이다. 솔로는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더 힘껏 감은 채 더듬거리는 손으로 이불 끝을 찾았다. 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너무 눈부셨기 때문에 솔로는 이불이 손가락에 걸리자마자 틀어쥐고 잡아끌었다.
그러면 너무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포근한 이불이 위로 올라와야 하는 게 맞았다.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살로부터 그를 가려줄 그늘을 만들어줘야 정상인데, 솔로의 이불은 그렇지 못했다. 부드럽게 따라오던 이불이 무언가에 걸린 듯 턱하니 멈춰섰다. 솔로는 침대 틈새에 끼었나 싶어 눈을 감은 채 몸을 웅크리며 이불을 두어번 더 흔들었다. 그러나 한 번 멈춰선 이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솔로는 손을 들어 눈을 가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일리야. 솔로는 이불을 붙잡은 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깰 때까지 소리도 내지 않던 일리야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일어나라. 카우보이."
"…그냥 못 본 척하고 아까처럼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카우보이."
"밤새 한숨도 못 잔 거 알잖아."
"나폴레옹."
여전히 눈을 감고 투정을 부리던 솔로의 눈동자가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눈 밑부터 눈동자까지 졸음이 가득할 게 뻔한데 이 융통성 없는 파트너는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맙소사.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마른 세수를 하는 두 손 사이에 웅웅거리며 울렸다. 솔로는 느릿하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로 어제 끝났던 임무는 꽤나 고된 편이었다. 육체적으로는 힘들 일이 많지 않았지만 타겟이 미적대며 시간을 끄는 통에 기다림이 길어졌다. '차라리 죽이지 않는 선에서 총으로 한 발 쏴도 된다고 했으면 좋겠네요.' 한숨과 함께 터지는 솔로의 말에 기다리다 지친 개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리한 타겟을 붙잡아야 하는 경우는 그만큼이나 귀찮은 일이 많았다. 이동하는 동안 누군가 자신을 따라온다는 사실을 빨리 눈치챘고, 몸을 숨기는 데도 능통했다. 함정도 걸리지 않았고, 솔깃한 거래-이 역시 거래를 빙자한 함정이었으나-도 받아들일 듯 하더니 직전에 나타나지 않았다.
겨울 추위가 한창일 무렵에 시작된 임무는 요리조리 잘도 도망치는 타겟 덕분에 찬바람이 누그러들 때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웨이벌리가 사전에 말한대로 정말 '상처 하나 없이'까지는 아니었지만 팀원 중 누구도 그 사실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았다. 장작으로 뒤통수를 한 대 때린 정도야 그들이 타겟 때문에 했던 고생에 비하면 양호하다고 여겨질 정도였으니 웨이벌리도 한숨을 푹 쉬는 걸로 보고서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임무를 끝으로 모두가 바라던 휴가가 찾아왔다. 각자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헤어졌는데, 일리야는 자신의 짐을 집에 풀어두기 무섭게 솔로의 집을 찾아왔다. 막 잠에 빠지려던 사람을 깨워 현관문을 열게 하더니,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입술이 뺨 위로 내려앉았다. 허탈하게 웃던 솔로가 일리야의 목에 손을 감고 시작한 입맞춤부터 밤은 느릿하게 흘렀다. 임무를 하는 동안 함께 하지 못했던 아쉬움만큼 일리야는 솔로를 놓아주지 않았고 동이 조금 틀 때 즈음에야 겨우 눈을 부칠 수 있었다.
그래서 솔로는 눈 뜨기가 이렇게나 힘든데 저 러시아 사내는 대체 무슨 체력으로 남의 잠마저 방해하는 지 알 수 없었다. 하아. 솔로는 고개를 느리게 저으며 침대 곁에서 책을 읽고 있는 일리야를 쳐다보았다. 의자에 앉은 모습이 평소와 다름없이 깔끔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움직이는 때에는 대게 깔끔한 차림은 솔로의 몫이었으나 오늘은 아니었다. 그는 이불을 걷어내고 한 쪽에 걸쳐진 목욕가운을 대충 두르고 욕실로 향했다. 쏟아지는 물소리 사이로 바깥에서 일리야가 움직이는 소리가 종종 들려왔다.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 문이 여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솔로는 느긋하게 몸을 씻었다.
솔로가 한참만에 개운한 얼굴로 욕실문을 열고 마주한 광경은 의외의 모습이었다. 일리야 쿠리야킨이 요리하는 모습이라니. 흔하지 않은 모습을 눈에 담던 솔로가 소리없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가 나오는 소리를 못 들었을 리 없는 일리야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을 걸어왔다. 완성된 요리를 접시에 담는 표정이 진지하면서도 덤덤했다.
"바깥에서 기다려라. 나폴레옹."
"물론이지."
일리야의 말대로 햇살이 잘 드는 테라스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긴 솔로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작은 화분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하하하. 화분에 심어진 앙증맞은 노란 꽃을 발견한 솔로가 소리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What. 퉁명스런 대꾸가 부엌에서 비집고 나오자 웃음은 더 겉잡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솔로는 몸을 돌려 요리를 들고 나오던 일리야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폴레옹 솔로는 무언가 걸리는 느낌에 발을 들어 구두코로 바닥을 쿡쿡 찔렀다. 하지만 구두는 벌어지는 틈도 없이 멀쩡히 붙어있었다. 이상하다. 자세히 살펴볼까 싶어 조금 기울인 고개 위로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뭐하나. 카우보이."
목소리를 따라 숙였던 고개를 다시 올리자 일리야가 팔짱을 껴고 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빤히 닿아오는 솔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눈빛을 더 매섭게 하며 슬쩍 턱을 치켜들었다. 왜. 직접 입을 움직여 묻지는 않았지만 의미 전달이 확실한 눈빛이었다. 솔로는 순간 구두에 손을 댔느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찾아낸 추적기를 서로에게 던진 게 불과 하루 전 일이었다.
떼어진 입술이 무어라 소리를 내는 대신 한숨을 내쉬자 일리야의 눈꼬리가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솔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페릴. 부드럽게 굴자고."
"할 말 있으면 해라."
"개비 일로 예민한 건 알겠는데 너무 날세우지 말란 소리야."
"지금 그 말이…"
이럴 때는 누가 스파이 아니랄까봐 눈치가 빠르다. 화제 돌리는 일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자 솔로는 얼른 의자에 걸쳐두었던 재킷을 집어들었다. 때마침 개비와 그녀의 삼촌이 탄 차량이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킷에 팔을 끼워넣으며 솔로는 느긋하게 미소지었다.
"일할 시간이네. 난 빅토리아를 만나러 갈테니 자네도 출발해."
솔로는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재빨리 호텔방 문을 열고 나섰다. 문이 닫힐 때까지 일리야의 대답도,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벌써 따라와도 모자랄 성격이 분명한데. 솔로는 잠시 뒤돌아보았다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발걸음을 떼었다. 확인차 구두코를 다시 한 번 바닥에 찍었지만 여전히 구두는 멀쩡했다. 걸리는 느낌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기분 탓인가. 솔로는 그렇게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2.
커버가 날아갔다.
일렁이는 시야는 솔로의 통제를 벗어나있었다. 기어코 빅토리아의 입에서 자신의 본명이 나왔을 때, 솔로는 최대한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최대한 얻어두어야 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사진들을 한 번 스윽 훑어보고나자 숙취처럼 졸음이 밀려왔다. 솔로는 빅토리아가 하는 말에 가볍게 대꾸하며 한 쪽에 놓여있던 쿠션을 집어들었다.
하나, 둘. 쿠션을 쌓고 누울 자리를 손으로 눌러보던 솔로는 발 끝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잠시 시선을 옮겼다. 낯선 감각이 발 끝에서 발바닥을 타고 흘렀지만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깨어나서, 그에게 시간이 있다면, 확인해볼 일이었다. 솔로는 쿠션을 베개 삼아 소파 위에 길게 누웠다.
"잘 자요, 나폴레옹."
반갑지 않은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3.
솔로는 이를 악 물고 손에 잡힌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손가락마다 연결된 금속 장치로 저릿하다 못해 온몸을 뒤흔드는 감각이 흘러들어왔다. 허리와 머리에 감긴 가죽벨트가 발악하려는 몸을 단단히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내려감은 눈꺼풀 아래로 빛이 번쩍거리는 듯한 환각이 매초마다 반복해서 나타났다. 정신이 제대로 붙잡히지 않는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펄떡거려도 모자란 몸을 덜덜 떨며 입술 사이로 흘러나가려는 신음을 삼키는 게 전부였다.
끝까지 지켜보지 못해서 안타깝네. 빅토리아는 빈 말을 할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솔로의 죽음을 명령했을 것이다. 그녀의 방식대로 천천히, 음미하듯이. 그렇다면 그가 살아서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잠시 헤아리던 솔로는 고통에 굴복했다. 머릿속을 하얗게 지워내는 기분이었다. 뒤통수가 뻐근해지고 코 끝에서 윗입술을 타고 미적지근한 기분이 들 때서야 루디는 페달에서 발을 떼었다. 참고 있던 숨이 한꺼번에 터지며 저절로 신음이 터졌다.
연결된 장치들을 모두 떼기 전까지는 자유로울 리 없었지만, 솔로는 숨을 고르는 동안 눈동자를 굴려 문 밖을 쳐다보았다. 옆에서 무어라 떠드는 루디의 말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빅토리아가 왔을 때부터 무장을 하고 움직이던 경비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딱딱하게 굳은 채 옆얼굴을 보여주며 움직이던 때와는 다른 움직임에 솔로는 눈가에 힘을 주었다. 경비는 비틀비틀 옆으로 움직이다 풀린 눈동자로 쓰러졌다. 솔로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눈을 두어번 깜빡이자 이내 익숙한 옷차림의 러시아 사내가 시야에 들어왔다. 페달이 달칵거리는 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떠도 일리야는 여전히 시야에 있었다.
그제야 확신이 든 솔로는 묶인 상태에서 억지로 뒤척였다. 일리야는 검지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가져다대더니 홀연히 사라졌다. 솔로는 혼자 떠들어대는 루디의 말을 넘겨들으며 간신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묶여있는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하루종일 그를 괴롭혔던 구두가 있었다.
저 구두를 확인해야 하는데. 거기까지 떠올린 솔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거였군. 생각을 정리한 솔로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