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타로합작에 참여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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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운명의 수레바퀴 (역방향) - 불운, 오산

이자성

w. Edyie



  회장 이자성.

  그렇게 쓰인 까만 명패를 앞에 둔 자성이 미동도 없는 자세로 앉아있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서는 구분되지도 않은 만큼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고 잠든 모습에 재헌은 가져온 서류들을 조용히 책상 위에 내려놓고 방 안에 있던 부하들을 향해 손짓했다. 나가보라는 뜻이었다. 재헌은 나란히 늘어서있던 부하들이 전부 퇴장하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 발짝 떨어져 서서 ‘회장님’하고 짧게 말을 걸었다. 첫 번째는 들리지 않은 듯 움직임이 없었다.


  “회장님.”

  “…….”


  재차 부르자 그제야 내려와 있던 눈꺼풀이 올라가며 자성은 잠에서 깨어났다. 잠들기 전이나 별 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느릿하게 눈을 두어번 깜빡이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 앞에 선 재헌을 쳐다보았다. 재헌은 걱정스레 자성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회장님. 차라리 병원에 가보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됐다. 요 며칠 제대로 못 자서 이러는 걸 가지고.”

  “벌써 보름 가까이 그러셨잖습니까. 병원에는 조용히 연락을….”

  “됐다니까.”


  딱 잘라 말하는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재헌은 뭐라 더 말을 하려다 말고 고개를 숙인 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자성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자성이 회장 자리에 오른 지도 어느새 석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일처리에 있어서는 원래 군더더기 없던 자성인지라 업무 쪽은 별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자성의 상태였다. 재헌의 말이 맞았다. 그는 약 2주 정도 전부터 기면증에 가까운 증상을 겪었다. 별 일 아니라고 말은 했지만 자성은 아까처럼 짧은 잠에서 깨고 나면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 그의 꿈에 나타나는 검은 형체 때문이었다.

  자성은 꿈속에서 항상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그러면 책상 위에 놓여있던 명패가 갑자기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가 기괴하게 솟아올랐다. 괴물처럼 꿈틀거리던 검은 형체는 눈 깜빡하는 사이 모습을 바꾸어 눈앞에 나타났다. 어느 날은 정청이기도 했고, 이중구에서 강형철로, 다시 오석무나 이신우로 변했다. 정해진 규칙 따위도 없었고, 하루에 여럿으로 변하는 날도 있었다. 자성은 그때마다 망자의 모습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꿈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고개를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꿈에서 깰 때까지 망자와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불가항적 상태로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누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턱 막혀왔다. 그리고 자성이 정말 끝에 도달했을 때, 망자는 아주 천천히 눈을 내려감았다. 망자의 눈이 도로 뜨이는 순간에야 자성은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지독한 꿈이 매일같이 반복되었다. 자성은 꿈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봤지만 소용없었다. 소리 소문도 없이 다가와 그를 사로잡는 잠을 막을 수도 없었다. 자성은 여전히 무거운 침묵만이 가득한 집무실에 갇혔다가 빠져나오기를 반복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자성은 담배 끝이 타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다 한 가지 의문에 도달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처음 그가 순경이 되었을 때만 해도 조직에 들어와 짜바리짓을 할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강형철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도 계획대로 금방 끝날 거라, 골드문에 들어오고 난 뒤에는 석동출이 처리되면 정말로 끝일 거라 생각했던 이자성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고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항상 뒤틀렸다. 얽히고설킨 사건들은 기어코 지금의 결과를 안겨주고 나서야 자성에게서 떨어져나갔다. 그 사이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고 남은 것은 오로지 이자성뿐이었다. 회장 이자성. 여전히 익숙지 않은 호칭은 자성이 쥔 마지막 앙금이었다. 자성이 끝끝내 잡지 못했던 모든 것들의 찌꺼기인 셈이었다.


  이자성은 이따금씩 '상상'을 했다. 신세계 프로젝트는 어떻게 끝날 시나리오였을까.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었더라면 자성은 어떤 모습으로 그 길 끝에 서 있을까. 작게는 멀어져버린 미래에서 시작된 생각이 어느 시점을 지나치면 이미 틀어져버린 과거로 흘러들어갔다. 그러면 자성은 그가 청의 마음에 들지 않아 조직에 끼지도 못했거나 여수에서 칼을 제법 깊게 맞았을 적에 죽어버렸으면. 그랬다면 어땠을 지를 상상해보았다.

  하지만 상상은 그가 무심코 태우는 담배만큼이나 덧없는 것이었다. 이제 자성의 곁에는 회장 명패와 종종 찾아오는 악몽이 맴돌고 있었다. 계산착오를 탓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성이 모를 리 없었다. 이자성은 현실을 피하지 않았다.

자성은 담배 끝에 달려있던 재를 털어냈다. 파스스 흩어지는 부스러기가 재떨이 안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남은 한 모금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짧아진 담배를 식어버린 재 위로 뭉개어 껐다. 이자성의 앞에는 새카만 명패가 반짝이고 있었다.

Posted by Edyi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