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1. 23


* 일리야솔로

* 결말을 뒤틀었습니다. 캐릭터 사망소재 주의.


맨프엉 전력주제 : 거울

w. Edyie



  일리야는 제 등 뒤에서 넘어온 온기에 몸서리를 치며 눈을 떴다. 짧은 순간 경련과도 같은 떨림이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어둠 탓에 둔감해진 시력이 몸을 휘감은 팔의 존재를 깨닫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일리야는 그 사이 느리게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이윽고 시야에 들어온 익숙한 손을 확인한 순간, 그의 입에서는 무거운 한숨이 터졌다. 일리야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다시 눈꺼풀을 내려감았다. 일리야의 상태를 눈치 챈 솔로는 허리께에 감은 팔에 슬쩍 힘을 주었다.


  "페릴. 일어났으면 잠깐 돌아봐줘도 되지 않나?"

  "…나폴레옹."

  "그거 참 다정한 호칭인데."


  일리야는 어깨 위로 얼굴을 묻는 솔로를 알았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그의 파트너가 눈을 조금 크게 뜨고 장난스런 미소를 걸고 있을 참이었다. 때때로 얄밉기도 했지만 일리야가 좋아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리야는 솔로의 표정을 확인하는 대신 내려감은 눈에 더 힘을 주었다.

  일리야는 아침 일찍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야 했다. 지금은 아직 해가 뜰 기미도 보이지 않는 새벽이었고, 그의 피곤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더 자둘 필요가 있었다. 일리야는 고집스레 모로 누운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상대는 눈치가 빠른 미국의 스파이였다. 솔로는 뻗었던 손을 거두는가 싶더니 허벅지 근처에 힘없이 늘어뜨려진 일리야의 손을 잡았다. 효과는 솔로가 기대했던 만큼 확실했다. 막 잠에 빠지려던 일리야는 눈을 뜨고 움찔거렸다. 그리고 닿았던 손 끝부터 잘게 떨기 시작하더니 손가락을 까딱이기 시작했다. 일리야의 반응에 놀랐는 지 솔로는 재빨리 손을 거두고 잠시 침묵하더니 너스레 섞인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걸어왔다.


  "하하. 뭘 그렇게 놀라나. 손이 닿았을 뿐인데." 일리야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까딱이는 손가락의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페릴? 등 뒤에서 솔로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일리야는 대답을 할 수도, 시야를 돌릴 수도 없었다. 애초에 잠결에라도 대답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일리야는 때늦은 후회를 하며 손가락을 멈추려 애를 썼다. 뜻대로 되지 않자 어둠을 마주한 눈동자가 작게 흔들리는 지 시야가 어지러워졌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기어코 불규칙한 숨소리가 터지자 솔로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어깨에 닿은 손이 슬쩍 그를 뒤로 당김과 동시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일리ㅇ……."

  "그만!"


  윽박에 가까운 외침에 솔로의 목소리가 밀려나듯 사라졌다. 동시에 일리야를 끌어당기던 힘도, 어깨에 닿았던 손도 사라졌다. 일리야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손바닥 안으로 얼굴을 묻었다. 한참을 걸터앉아있자 날뛰던 호흡은 가라앉았다. 그러나 여전히 솔로의 손이 닿았던 손가락은 작은 잔상을 남기며 떨고 있었다. 다정하게 그를 걱정하던 솔로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다행히도 몇 번의 반복을 통해 일리야는 스스로 이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제 기억한 순서대로 움직일 차례였다. 일리야는 고개를 들고 내려감았던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올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 솔로가 누워있던 자리를 '확인'했다.

  솔로는 그곳에 없었다. 일리야가 누웠던 자리는 이불이 눌린 상태였지만 솔로가 있던 자리는 일리야가 눕기 이전 상태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떨리는 손을 뻗어 자리를 짚어보았지만 온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확인'이 끝나자 일리야의 입에서 자조적인 웃음이 터져나왔다.


  나폴레옹 솔로는 오늘 저녁 이곳에 없었다. 처음부터 온 적이 없었다.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은 일리야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눈을 감기만 해도 솔로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옅은 하늘색 셔츠 위로 번져나가던 검붉은 자욱, 얇은 카펫 위로 떨어지던 아버지의 손목시계, 총상을 입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던 나폴레옹 솔로와… 방아쇠를 당긴 총을 내려다보던 러시아 사내, 일리야 쿠리야킨. 모든 조각이 합해져 솔로의 죽음을 만들지 않았던가.

  솔로는 죽어가는 순간까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는 한숨 섞인 웃음을 터트리고는 일리야의 이름을 부르며 쓰러졌다. 발치에 떨어진 손목시계의 유리가 산산히 부서지는 모양이 느리게 재생되었다. 동시에 솔로는 피로 얼룩진 손을 뻗어 디스크를 움켜쥐더니 창 밖을 향해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베이지색 카펫 위로 무너진 솔로가 겨우 시선을 마주한 일리야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일리야가 총을 버려가며 달려갔지만 솔로의 마지막 숨이 한 발 빨랐다. 바닥으로 떨어진 손은 간신히 일리야의 손 끝을 스쳤을 뿐이었다.

  솔로의 죽음 중에 가장 선명하게 남은 그 감각은 이따금씩 일리야를 찾아왔고 환상과 환청을 만들어냈다. 그 때마다 일리야는 버릇보다 심하게 손을 떨었다. 오늘도 그런 날 중에 하루였다.


  일리야는 더디게 떨림이 잦아든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그는 피로가 가시지 않은 눈을 찬 손바닥으로 누르고 있다가 시선을 바로했다. 응접실에 걸려있는 커다란 거울 속에 방 안의 풍경이 비춰지고 있었다. 혼자 쓰기에는 넓어보이는 침대 위로 지친 얼굴을 한 사내가 앉아있었다. 그의 옆자리는 여전히 텅 빈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