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키는 눈을 뜨자마자 그렇게 생각했다. 부드럽게 살랑이는 바람 덕에 깜빡 속을 뻔 했지만 그는 가볍게 인상을 쓰며 정신을 차렸다. 몇 번을 되짚어보아도 그에겐 한가롭게 볕 잘드는 정원에 앉아 잠든 기억이 없었다. 아스가르드의 오래된 역사가 적힌 손 때도 거의 타지 않은 책을 뒤적이다 잠시 잠든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꿈이라니. 그는 어리석게도 꿈에 빠진 자신을 책망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을 돌아보고 할 말을 잃었다.
그가 앉아있는 곳은 아스가르드 궁전의 한 켠에 마련된 작은 정원이었다. 그의 눈 앞에 제일 먼저 들어온 나무는 오딘이 젊었을 적부터 있었다던 아름드리 커다란 나무였고, 토르와 함께 자라는 동안 곧잘 놀았던 나무였다. 조금 커버린 이후에는 토르나 로키나 각자의 일을 하느라 발길을 끊었지만, 어릴 적의 기억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곳이었다. 로키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빠르게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간 어린 토르가 왕자 수업이 지루하다며 쪼르르 달려나가 다람쥐처럼 나무를 타고 올라가 숨어버렸고, 한참이 지난 뒤 어린 로키 역시 나무 근처로 사뿐히 걸어왔다. 혼자서 수업을 듣고 제 형제가 어디 있을지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공부한 책을 들고와 나무 그늘 아래 털푸덕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책갈피가 꽂혀있는 부분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책을 다시 폈다. 으아아. 나무 위에서 어린 토르가 그런 동생의 모습을 보고 공부하기 싫다는 내색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어린 로키는 토르의 한탄을 들으며 한 마디를 보탰다.
'토르, 오늘도 수업에 빠진 걸 아시면 올파더께서 혼내실텐데.'
'괜찮아. 그리고 공부한 내용은 네가 알려줄 거잖아.'
'맨날 말하는 거지만....두 번 일을 할 바엔 직접 공부하는 게 낫지 않아?'
'책만 봐도 잠이 오는 걸 어떡해. 너 귀찮은 거지? 그러지 말고, 응? 오늘은 뭘 배웠는데?'
'오늘은....'
어린 로키는 펼쳐진 페이지를 눈으로 쭉 훑었고, 표시되어 있는 부분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직은 앳된 목소리가 가만가만 정원을 돌아 퍼져나갔다. 한참을 읽다가 반응이 없으면 굳이 나무 위를 쳐다보지 않고도 그의 형제에게 잠들지 말라고 핀잔을 한 번 주는 재치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면 어린 토르는 멋쩍은 웃음을 터트리며 계속하라고 했고, 로키는 가만히 고개를 내젓고 다시 책을 읽어나갔다. 로키가 배운 내용을 느리게 설명할 동안 그런 일은 서너 차례 반복되었다. 한 그루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햇볕을 피해 앉은 두 형제에게 있어 그건 익숙한 일상의 풍경이었다.
꿈에 나온 걸 보니 이 때가 그립기라도 했나. 로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슬쩍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린 토르는 아직 그에겐 넓은 나무 기둥 위에 배를 깔고 누워 한가롭게 늘어져 로키를 내려다보며 졸린 눈을 억지로 부릅뜨고 있었다. 그러자 어린 로키가 책을 읽다말고 한숨을 폭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토르. 자꾸 그렇게 잠들면 다음부턴 안 가르쳐줄 거야. 말을 끝마치고 입술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유지하는 표정이 제법 귀여웠다. 어렸을 때 이렇게 귀여운 짓도 할 줄 알았다니. 로키는 예상하지 못했던 과거의 모습덕에 소리 없이 엷게 웃음지었다. 잠깐동안 침묵이 어색했는 지 토르가 능청스레 웃으며 사과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키는 그 목소리를 듣다가 저 때나 지금이나 토르는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단순하기도 하지.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동안 어린 로키는 다시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차분하게 읽어나갔다.
하지만 잠시 후, 오랫동안 그들을 돌봐왔던 유모의 목소리가 들리자 둘은 동시에 동작을 멈추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르왕자님! 로키왕자님! 가까워지는 외침소리에 토르는 재빨리 나무에서 내려와 옷을 털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로키의 옆에 자리잡았다. 그것도 잠시 유모와 함께 다가오는 프리가를 발견하자마자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을 크게 뜨고 평범한 또래 아이들처럼 어머니의 품에 달려가 안겼다. 어머니! 자세를 낮추고 손을 뻗어 두 아이를 품에 안은 프리가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토르와 로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이들은 따스한 어머니의 눈길을 받으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리고 여신의 손을 한 쪽씩 나누어잡고 그녀가 걷는대로 따라걸으며 재잘댔다. 토르는 역사 수업 전에 있던 무술 수업이 얼마나 흥미로웠는지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고, 로키는 토르의 이야기에 섞인 유치한 과장에 대해 콕콕 집어내며 프리가에게 배웠던 간단한 마법을 선보였다. 복도를 가득 울리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멀리서 지켜보는 로키도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는데 프리가는 한없이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두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니. 로키는 그런 프리가를 바라보며 멀어져가는 세 사람의 뒤를 따라 느릿하게 걸었다.
그러다 복도 끝에서 세 사람이 휙 돌아 사라지자마자 로키는 갑자기 발 아래가 훅 꺼져들어가는 기분을 느끼고 크게 휘청였다. 간신히 중심을 잡아 제자리에 선 로키는 눈 앞에 나타난 제 어릴 적 모습에 다시 한 번 말을 잃었다. 어린 로키는 깜깜한 방 안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가가 붉게 헐어있는, 지금의 자신이 봐도 참으로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로키는 이 날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오딘의 앞에서 토르와 로키, 두 어린 왕자가 대련을 한 날이었다. 결과는 누가 봐도 뻔한 로키의 참패였다. 그 사실만 해도 분해 죽겠는데 타는 속도 모르는 멍청한 형은 승리한 그대로 함박웃음을 걸친 채 오딘에게 달려갔다.
'아버지, 제가 이겼어요! 제가 아스가르드 최고의 전사가 맞죠?'
승리와 기쁨에 도취한 어린 전사의 목소리가 귓가를 강하게 때렸다. 로키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차마 놓지 못했던 검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토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오딘과 눈이 마주쳤다. 오딘은 큰아들을 인자하게 내려다보다 로키를 보고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왔다. 어린 로키는 마른 침을 삼키고 애써 떨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이미 손 끝은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상황을 보고 뭐라 하실까. 머릿속으로 무수한 가정을 세워보았지만 오딘이 로키의 앞이 아닌 옆에 섰을 때, 그 모든 가정은 송두리째 날아가버렸다. 오딘은 그저 로키를 지나쳤다. 다만 떨고 있는 아이의 옆에 잠시 서서 어깨를 도닥여주거나 애썼다는 말, 혹은 꾸짖는 대신
'더 노력하거라.'
딱 한 마디를 남겼을 뿐이었다. 로키는 왠지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토르가 나무로 만들어진 창을 멋스럽게 돌리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걸어오자, 그 공허함은 이내 분노로 폭발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던 일이었지만 어릴 적의 로키는 오딘에게 신임받고 빛나는 그의 형제에게 꽤 질투를 느끼고 있던 모양이었다. 어찌되었거나 로키는 손에 들었던 검을 고쳐쥐고 그대로 토르에게 달려들었다. 무방비 상태였던 토르는 커다란 비명과 함께 뒤로 쓰러졌고, 형제를 등지고 연무장을 빠져나가던 오딘은 어느 새 뒤로 돌아 뒤엉킨 두 아이를 향해 소리쳤다. 그만! 좌중을 흔드는 고함소리에 로키가 놀란 눈으로 내지르던 주먹을 멈췄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일을 벌여 분위기를 소란스럽게 만든 벌로 로키는 한동안 근신하며 기사도에 대해 다시 공부해야했다. 인정받기를 간절히 원했을 뿐이었는데. 과욕이 부른 결과는 엄격하고 혹독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로키가 보고 있는 이 눈물의 현장은 근신하던 날 중 일어난 작은 사건이었다. 아스가르드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일이기도 했다. 로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꿈 속의 자신에게 가볍게 말을 던졌다. 들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리기도 하지."
'.....누, 누구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던 아이는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이었다. 물론 놀란 것은 이 쪽 로키도 매한가지였다.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자신에게 누구냐고 묻는 꿈이라니. 로키는 잠시 고민하며 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다른 사람인 척하려다 자신과 똑같은 눈동자를 보고 말문이 막혔다. 명색이 장난의 신인데 자신의 과거를 보며 거짓말을 할 수 없다니 우스울 노릇이었다.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너. 아스가르드의 로키다."
'거짓말.'
"믿고 안 믿고는 네 선택이니 굳이 구걸하지 않겠어."
'정말 '나'야?'
"나도 내가 이렇게 멍청했다니 믿고싶지 않거든."
쏘아붙인 말에 어린 로키는 눈을 크게 뜨고 로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축축하게 젖은 눈가를 대충 훔치고서 잠깐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로키는 한숨을 내쉬고 어린 자신에게 먼저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얼른 말해."
'그럼 묻고 싶은 게 있어.'
"뭔데."
'훗날 나는... 그러니까 당신은 어떤 사람이야?'
정곡을 찌른 질문이었다. 선뜻 대답해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로키는 설령 이것이 꿈일 지라도 어릴 적 자신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마법, 밀려난 2인자, 토르의 그림자. 그런 사실을 말할 바에야 혀를 깨물고 아픔을 느껴 꿈에서 깨버리는 편이 나았다. 그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올려다보는 눈동자에는 기대와 불안감이 번갈아가며 내비쳤다. 결정을 내린 로키는 우선 무릎을 굽혀 어린 로키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작은 어깨 위에 손을 얹고 부드러운 손짓으로 토닥였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어린 로키는 눈만 깜빡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렇지만 토를 달지 않고 얌전히 미래의 자신이 건네는 격려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너는, 로키는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네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굉장한 능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 거야. 지금처럼 울고 있을 일은 없겠지. 기품있는 왕족으로서, 아스가르드의 위상을 드높이는 자가 될 거야."
'와...'
"그러니까 이렇게 궁상맞게 울지 마. 널 바보로 보는 사람이 없어야지."
'응. 약속할게. 꼭, 존경받는 왕이 될 거야.'
"....그래."
왕이라고 한 적은 없지만. 로키는 신이 난 아이와 마주하며 씁쓸한 끝 말을 삼켰다. 비록 그가 말한 모든 것이 거짓이라 해도 꿈 속의 자신이 울지 않았으면 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로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아이가 더 들려달라며 붙잡는 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 했다. 꿈에서 깰 시간이었다. 다음에. 그는 짧은 말을 남기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눈 앞에 보이는 까만 어둠으로 뛰어들며 로키는 현실에서 눈을 떴다. 조용한 아스가르드 서재에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