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성] 위로 (for. cciz)

2013. 12. 22. 02:48 from 사각사각


신세계 팬픽션

위로 (for. cciz)

w. Edyie



  자성은 안개가 자욱하게 낀 어딘가에서 눈을 떴다. 그래서 그는 뻑뻑한 눈을 한참동안 느리게 깜빡이고 나서야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 지 깨달았다. 바다의 근처에도 간 적이 없던 그가 부둣가 끝자락에 서 있었다. 최근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던 이후로 바다에 관한 어떤 추억도 곱씹고 싶지 않아 바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는데. 꿈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남자는 조심스런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디 넓은 바다가 보이고, 아주 멀리서 잔잔한 뱃고동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러다 자성은 문득 그가 보고 듣는 세상이 낯설어졌다. 꼭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메다꽂아놓은 쇠막대기가 된 기분이 들었다. 장소는 익숙했지만 그를 감싸고 있는 공기부터 발 밑에 차이는 돌멩이까지. 어느 것 하나 신경이 쓰이지 않는 물체가 없었다. 어째서 불안한 지 조차 알 수 없을 만큼 그는 예민해져 있었다. 그는 혹시 누가 볼까 흔들리는 눈동자를 애써 감추려 노력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의 옆을 항상 따라다니던 재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딜 갔는 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작업이라도 당한 건가 싶어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지만 묶인 곳도 없고, 아픈 곳도 없었다.

  이상하단 의심을 품으려던 찰나, 자성은 제 등 뒤에 닿아오는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자성은 어떻게 반응할까 잠시 고민하다 시선을 내려깔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두꺼운 철문이 창고 바깥 쪽으로 활짝 열려 있는 것이 언뜻 보였고, 누군가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양복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썩 어울리지 않는 복장. 발 끝만 보았을 뿐이었지만 이자성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 으이, 브라더.

  익숙한 호칭이 귓가에 닿자 자성은 얼른 고개를 들어 상대를 마주보았다. 인자사 고개를 쳐드는고만. 느 왜 목은 자라새끼마냥 축 늘으뜨리고 앉았냐. 으응? 익숙한 목소리와 표정에 안도하는 순간 애써 유지하고 있던 표정이 와르를 무너져내렸다. 갈 곳 잃은 긴장감이 풀려 자성은 제자리에 서 있다 말고 비틀거렸다. 그걸 보고 있던 청이 또 한 마디 잔소리를 보탰다. 그렇게 허약해서 어디 쓰겠냐는 둥, 보약 한 제 지어먹으라는 둥 여전히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자성에겐 어떤 희소식보다도 반가운 소리였다. 그는 흔들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창고 앞으로 걸어들어갔다. 몇 발자국 되지도 않는 거리가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 없었다. 자성이 다가오는동안 신나게 떠들던 청은 자성이 그의 앞에 도착해서 무릎을 꿇고 주저앉을 때가 되어서야 화들짝 놀란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야, 느 어디 아프냐. 병원 가봐야 허는 거 아니냐. 하지만 정작 자성은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 날갯죽지 사이에 들어온 투박한 손의 온기를 느끼자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에게 있어 금방 느낀 온기가 제일 아픈 통증이었다.


"형님...."

"왜."

"왜 이제야 오셨소."

"그게 무슨 섭한 소리냐잉. 기껏 버선발... 은 아니지만, 쓰리빠짝 끌고 나온 형님헌티."


  청은 으쌰, 하고 한 번 힘 들어가는 소리를 내더니 제가 앉아있던 의자에 자성을 올려앉혔다. 그리고 이내 그 옆 땅바닥으로 털푸덕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 모습이 퍽 정청다워 자성은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만에 본 얼굴이던가. 그의 영정사진 앞에 붙였던 향도 다 타들어가고, 49제도 지나 그의 이름을 기억하던 사람들도 흐릿하게나마 그를 떠올릴 만큼의 시간이었다. 그동안 야속하게도 청은 단 한 번도 자성의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자성은 그의 죽음을 더욱 실감할 수 밖에 없었다. 언제나 전화를 하던, 얼굴을 보던, 곁에 있던 정청이 그렇게 휙 사라질 줄 알았더라면 툴툴대지 말고 조금 더 잘할 걸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었다. 후회가 있었던만큼 꿈 속에서 만들어낸 청한테라도 잘해야하는데.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몸이 뜻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자성은 몸을 한껏 웅크려 얼굴을 감싸쥔 채 이를 악 물었다. 왈칵 울음이 터져나올 듯한 기분이었다.

  철썩이는 파도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오는 익숙한 부둣가. 자성은 이곳이 왜 이렇게 익숙한가 곱씹어보다가 북대문파 꼬맹이 시절 청과 함께 자주 돌아다니던 곳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북대문파의 본거지가 여수였던만큼 바다는 그들에게 매우 익숙했던 장소였다. 다만 가본 지 하도 오래되어 기억 저 편에 묻어놓았을 뿐이었다. 추억에 빠져 멀리 달아날 즈음 옆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라이터 켜는 소리가 들렸다. 자성이 몸을 풀고 일어나 힐끗 쳐다보니 청이 머나먼 수평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있었다.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뱉는 숨에 그들을 감싼 안개처럼 뿌연 담배연기가 섞여나왔다. 청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리 독허게 살라혔을텐디... 아주 이 형님 말씀은 개짖는 소리보다 못허지?"

"......"

"느 많이 힘들어 뵌다. 브라더."

"......"

"말 좀 제대로 혀봐라. 벙어리도 아니고 참말로 답답허다."


  형님, 나는... 자성은 거기까지 말하고 말을 멈췄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할 지, 무엇을 말해야 할 지.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뒤엉켜 엉망이 되어버렸다. 자성에게서 터져나오는 것은 한숨이었고, 청에게서는 담배연기였다. 하지만 청은 잠자코 자성이 다시 말을 이어갈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하아. 깊고 짙은 한숨을 달고 자성은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힘드오, 형님."


  이번에는 말을 꺼낸 청이 입을 다물었다. 입술 사이에 물린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그는 자성도 돌아보지 않은 채 안개 낀 부두를 눈에 담고 있었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생긴 공백을 꼼꼼히 메꾸었다. 청은 담배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뭉개어 끄고는 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의자에 앉은 자성의 허벅지를 두어번 도닥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행동에 놀란 자성이 벌떡 일어나려하자 어깨를 가볍게 눌러 다시 자리에 앉히고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마주했다. 청은 손을 올린 그대로 아까처럼 자성의 어깨를 다독였다.


"너는 딱 이 좆같은 형님만 믿으면 되야. 고것만 기억하면 돼."

"형님."
"아따. 형님 그만 부르고 아주 죽은 듯이 푹 자. 자장가라도 불러주랴?"

"그게 아니고, 할 말이 있어서..."

"난중에 얘기허자. 난중에."


  나중에 말고 지금 당장 얘기해야 하는 거요. 그렇게 덧붙이려 자성이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자성이 놀란 눈으로 옆에 선 청을 올려다 보았지만, 그의 얼굴 아래로 진 그림자가 표정을 가리었다. 그러나 거칠고 까맣게 그을린 손은 여전히 자성의 어깨 위에 올려져 있었다. 손을 타고 그를 위로라도 하듯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자성은 살아생전 정청의 성격을 생각하고 고개를 저었다. 한 번 마음 먹으면 자성의 생각이 어떻든간에 밀어붙이지만 그러한 일들 중 어떤 것도 자성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었다. 정청은 그런 사람이었다. 자성은 이번에도 제가 이기지 못할 것을 알고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내려감았다. 곁에서 청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한숨 자고 인나면 그 때 들어줄테니께 자라.

  자성아.


  자성은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에 피식 웃었다. 늘 쓰던 브라더 대신 이름이라니. 낯간지럽기도 했지만 한결 더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분명 의자에 앉아있다고 생각했던 자성의 몸이 넘어지듯 기울더니 이내 두툼한 이불들 사이에 안락하게 자리잡았다. 슬며시 드러낸 눈동자 사이로 지겹게도 익숙한 방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푸르스름한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인듯 했다. 침대 근처에 놓인 의자에 청의 하얀 양복자락이 보였다가 서서히 풍경에 녹아들었다. 점점 더 힘겨워지는 잠과의 싸움을 포기하며 자성은 마지막으로 청의 얼굴을 보았다. 어렴풋이 미소가 번지는 얼굴을 끝으로 그는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청이 바라던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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