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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9.12 일리야솔로 / Not bad
  2. 2016.10.03 맨프엉 전력 (주제:봄)
  3. 2016.10.03 맨프엉 전력 (주제:구두)
  4. 2016.10.03 맨프엉 전력 (주제:귓속말)
  5. 2016.10.03 맨프엉 전력 (주제:거울)

+ 맨프엉 개봉 1주년 기념 합작에 제출했던 글. 다른 존잘님들의 글은 이쪽에서 확인해주세요!



Not bad

w. Edyie



  넓은 회장을 가득 메운 웃음소리와 향마저 아름다운 음식들을 뒤로 한 나폴레옹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음을 바삐했다. 평소라면 임무를 끝냈어도 느긋하게 호화로운 파티 분위기를 즐겼을 그였지만, 그 날은 오전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임무를 하는 도중 혀를 축일 정도로만 마셨던 몇 잔의 술이 그의 시야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덕분에 나폴레옹은 챙겨야 할 물건을 손에 넣자마자-그의 삶을 통틀어 매우 드물게도- 자리를 벗어났다.

  겨울이 가까워질 무렵이라 밤공기는 쌀쌀하기보다는 춥다는 표현이 어울릴 법했다. 코트 깃을 한껏 세워 얼굴을 묻은 나폴레옹은 고급진 선율과 낭만적인 분위기를 아쉬워했다. 넓다란 정원의 양 옆으로 총총히 박힌 가로수 사이를 지나 그가 걸음을 멈춘 곳에는 작은 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는 익숙한 듯 손을 뻗어 뒷문을 열고 차 안에 몸을 밀어넣었다.


  "세상에. 오늘은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나왔어요?"

  "일은 확실히 끝냈으니 걱정 말고요. 일단 빨리 숙소로 돌아갔으면 하는데요, 개비."


  운전석에서 홱 하니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개비의 물음에도 나폴레옹은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이곳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안심할 수 없었지만 익숙한 얼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바짝 세우고 있던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조수석에 앉은 일리야가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보았지만, 그는 못 본 채하며 넓은 좌석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그에게는 여러 가지를 신경쓸 만큼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정수리 끝까지 퍼진 듯한 술기운에 머리가 어지럽기까지 했다. 나폴레옹은 차가운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얼굴 위에 가져다대었다.

  대화를 피하고자 하는 그의 행동에 개비는 툴툴거리는 말을 덧붙이며 시동을 걸었다. 옅게 떨리는 진동을 느끼며 잠이 드려는 찰나, 이번에는 낮은 목소리가 그의 잠을 방해했다.


  "솔로."

  "페릴. 나 피곤하니까 이따 얘기해."


  나폴레옹은 눈도 뜨지 않고 길어질 대화를 거절했다. 일리야는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시동소리가 가득한 차 안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비가 모는 차는 부드럽게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고 나폴레옹은 그가 바랐던대로 이번에는 누구의 방해도 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    *



  나폴레옹은 그로부터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절했다는 표현이 맞았다. 그는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원망하며 눈을 뜨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곰곰히 더듬어보아도 기억이 아귀가 맞지 않는 퍼즐마냥 조각조각 떨어져 있었다. 일리야의 얼굴이 보이기도 했다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손을 뻗는 개비의 표정이 떠오르다가 마지막에는 까만 시야뿐이었다. 제대로 기억이 나는 거라고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전부였다.


  '나폴레옹. 정신차려라. 나폴레옹!'

  '몸이 완전 불덩이잖아요. 얼른…'


  사고는 아주 물흐르듯 매끄럽게 일어났다. 유독 몸상태가 좋지 않던 나폴레옹이 임무를 끝내고 돌아오던 차 안에서 열을 못 이기고 쓰러져버렸다. 도착할 때까지 그가 곤히 자는 줄만 알았던 두 사람은 호텔에 도착하고 나서도 일어나지 못하는 나폴레옹을 깨우려다 야단이 났다. 어지러운 와중에도 이마며 뺨에 느껴진 서늘함으로 둘의 걱정을 알 수 있었다.     술기운 탓인 줄로만 알았던 두통이 오랜만에 된통 걸린 감기일 거라고는 나폴레옹 본인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으니 바빠진 건 함께 움직이던 두 사람이었을 것이다.


  눈을 뜨고 있던 기억보다 이불 속에서 앓는 소리를 내던 기억이 더 많아 그 이상은 되짚어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누워서 무슨 말을 했는 지조차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통에 나폴레옹은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걷고 바닥에 내려섰다. 혹시라도 햇볕이 잠을 방해할까 꼼꼼하게 쳐둔 커튼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비치는 걸로 보아 벌써 낮이 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얼마나 누워있었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냥 누워서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폴레옹은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넘기고 몸을 숙여 구두를 챙겨신은 뒤 방문 앞에 섰다. 몸은 여전히 피곤했지만 문을 열기 직전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는 매너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애써 정리한 보람도 없이 그는 문을 나서자마자 마주친 얼굴을 보고 말을 잃었다. 일리야는 소파에 앉아 가운데 놓인 커다란 테이블 위에 신문을 펼쳐두고 읽던 자세 그대로 나폴레옹을 쳐다보았다. 걸음을 멈춘 것도 잠시, 나폴레옹은 반가움을 드러내며 일리야에게 성큼 다가갔다.


  "개비는 어디 가고 혼자 남아있나."

  "잘난 누구 덕분에 아침에서야 잠들었다. 깨우지 마라."

  "자네도 잠깐 눈이라도 붙이지 그랬나. 피곤해보이는데."


  나폴레옹은 손을 뻗어 슬며시 까매지는 눈 밑을 쓸어내렸다. 일리야는 시야를 방해하는 그의 손에서 고개를 돌려 벗어나더니 신문을 접어 옆으로 밀어두었다. 얼굴에 드러난 피곤함이 나폴레옹을 미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부러 빠져나가는 일리야의 얼굴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일리야는 입으로는 퉁명스레 대꾸하면서도 더 이상 손을 피하지 않았다.


  "네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 본인부터 챙겨라."

  "너무하는군. 이건 날 위해 차라도 가져온 건가?"

  "…정신 사납게 굴지 말고 앉아서 기다려라."


  가만히 앉아있던 일리야는 나폴레옹이 테이블 한 쪽에 놓인 보온병에 손을 뻗자마자 그를 자리에 앉히고 대신 일어났다. 그러더니 행여 나폴레옹이 손댈 새라 재빨리 보온병을 다른 손으로 옮겨든 채 기다리란 말을 남기고 응접실에서 사라졌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손에는 음식이 든 접시와 식기, 다른 손에는 물이 든 컵을 들고 돌아와 나폴레옹의 앞에 내려두고 맞은 편에 앉았다. 식기를 건네받아 쥔 나폴레옹이 수저로 휘휘 젓자 주홍빛 수프 사이로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나폴레옹은 잠시 여전히 김이 올라오는 토마토 수프를 응시하다 일리야를 올려다보았다.


  "식기 전에 먹어라."

  "누가 만들었는 지는 안 알려주고?"

  "…맛있을 테니 잔소리 말고."


  반 쯤 확신에 찬 일리야의 모습이 대답을 대신하고 있어 나폴레옹은 한껏 눈웃음을 지으며 수프를 한 수저 떠서 입에 넣었다.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확신이 들게 하는 맛이 혀 끝을 감돌고 사라졌다. 재료 본연의 맛과 정말 간단히 더한 간 정도 뿐이었지만 입맛이 없던 나폴레옹에게는 부족함이 없는 맛이었다. 나폴레옹이 두어번 먹다말고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지만 일리야는 말을 걸지 않고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일리야가 가져온 만큼의 양을 비우고 가볍게 요기를 달랜 나폴레옹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냅킨에 입술을 닦았다.


  "아프면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먹을 수 있다니 가끔 앓아눕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꿈도 꾸지 마라. 나와 개비가…"


  장난스레 건네는 나폴레옹의 말에 예상대로 일리야는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일리야가 매섭게 눈을 치켜뜨기도 전에 나폴레옹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일리야의 양 뺨에 손을 가져다대어 얼굴을 끌어안았다. 무방비 상태로 고개를 빼고 있던 일리야가 엉거주춤 일어나자 나폴레옹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고맙다는 뜻이네. 일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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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dyie :

2016. 04. 10


* 일리야솔로


맨프엉 전력주제 : 봄

w. Edyie



봄은 나른한 계절이다. 솔로는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더 힘껏 감은 채 더듬거리는 손으로 이불 끝을 찾았다. 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너무 눈부셨기 때문에 솔로는 이불이 손가락에 걸리자마자 틀어쥐고 잡아끌었다.

그러면 너무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포근한 이불이 위로 올라와야 하는 게 맞았다.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살로부터 그를 가려줄 그늘을 만들어줘야 정상인데, 솔로의 이불은 그렇지 못했다. 부드럽게 따라오던 이불이 무언가에 걸린 듯 턱하니 멈춰섰다. 솔로는 침대 틈새에 끼었나 싶어 눈을 감은 채 몸을 웅크리며 이불을 두어번 더 흔들었다. 그러나 한 번 멈춰선 이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솔로는 손을 들어 눈을 가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일리야. 솔로는 이불을 붙잡은 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깰 때까지 소리도 내지 않던 일리야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일어나라. 카우보이."

"…그냥 못 본 척하고 아까처럼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카우보이."

"밤새 한숨도 못 잔 거 알잖아."

"나폴레옹."


여전히 눈을 감고 투정을 부리던 솔로의 눈동자가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눈 밑부터 눈동자까지 졸음이 가득할 게 뻔한데 이 융통성 없는 파트너는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맙소사.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마른 세수를 하는 두 손 사이에 웅웅거리며 울렸다. 솔로는 느릿하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로 어제 끝났던 임무는 꽤나 고된 편이었다. 육체적으로는 힘들 일이 많지 않았지만 타겟이 미적대며 시간을 끄는 통에 기다림이 길어졌다. '차라리 죽이지 않는 선에서 총으로 한 발 쏴도 된다고 했으면 좋겠네요.' 한숨과 함께 터지는 솔로의 말에 기다리다 지친 개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리한 타겟을 붙잡아야 하는 경우는 그만큼이나 귀찮은 일이 많았다. 이동하는 동안 누군가 자신을 따라온다는 사실을 빨리 눈치챘고, 몸을 숨기는 데도 능통했다. 함정도 걸리지 않았고, 솔깃한 거래-이 역시 거래를 빙자한 함정이었으나-도 받아들일 듯 하더니 직전에 나타나지 않았다.

겨울 추위가 한창일 무렵에 시작된 임무는 요리조리 잘도 도망치는 타겟 덕분에 찬바람이 누그러들 때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웨이벌리가 사전에 말한대로 정말 '상처 하나 없이'까지는 아니었지만 팀원 중 누구도 그 사실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았다. 장작으로 뒤통수를 한 대 때린 정도야 그들이 타겟 때문에 했던 고생에 비하면 양호하다고 여겨질 정도였으니 웨이벌리도 한숨을 푹 쉬는 걸로 보고서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임무를 끝으로 모두가 바라던 휴가가 찾아왔다. 각자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헤어졌는데, 일리야는 자신의 짐을 집에 풀어두기 무섭게 솔로의 집을 찾아왔다. 막 잠에 빠지려던 사람을 깨워 현관문을 열게 하더니,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입술이 뺨 위로 내려앉았다. 허탈하게 웃던 솔로가 일리야의 목에 손을 감고 시작한 입맞춤부터 밤은 느릿하게 흘렀다. 임무를 하는 동안 함께 하지 못했던 아쉬움만큼 일리야는 솔로를 놓아주지 않았고 동이 조금 틀 때 즈음에야 겨우 눈을 부칠 수 있었다.

그래서 솔로는 눈 뜨기가 이렇게나 힘든데 저 러시아 사내는 대체 무슨 체력으로 남의 잠마저 방해하는 지 알 수 없었다. 하아. 솔로는 고개를 느리게 저으며 침대 곁에서 책을 읽고 있는 일리야를 쳐다보았다. 의자에 앉은 모습이 평소와 다름없이 깔끔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움직이는 때에는 대게 깔끔한 차림은 솔로의 몫이었으나 오늘은 아니었다. 그는 이불을 걷어내고 한 쪽에 걸쳐진 목욕가운을 대충 두르고 욕실로 향했다. 쏟아지는 물소리 사이로 바깥에서 일리야가 움직이는 소리가 종종 들려왔다.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 문이 여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솔로는 느긋하게 몸을 씻었다.


솔로가 한참만에 개운한 얼굴로 욕실문을 열고 마주한 광경은 의외의 모습이었다. 일리야 쿠리야킨이 요리하는 모습이라니. 흔하지 않은 모습을 눈에 담던 솔로가 소리없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가 나오는 소리를 못 들었을 리 없는 일리야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을 걸어왔다. 완성된 요리를 접시에 담는 표정이 진지하면서도 덤덤했다.


"바깥에서 기다려라. 나폴레옹."

"물론이지."


일리야의 말대로 햇살이 잘 드는 테라스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긴 솔로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작은 화분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하하하. 화분에 심어진 앙증맞은 노란 꽃을 발견한 솔로가 소리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What. 퉁명스런 대꾸가 부엌에서 비집고 나오자 웃음은 더 겉잡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솔로는 몸을 돌려 요리를 들고 나오던 일리야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니까, 자네가 봄을 데려온 거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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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dyie :

2016. 02. 13


* 일리야솔로


맨프엉 전력주제 : 구두

w. Edyie



  1.

  나폴레옹 솔로는 무언가 걸리는 느낌에 발을 들어 구두코로 바닥을 쿡쿡 찔렀다. 하지만 구두는 벌어지는 틈도 없이 멀쩡히 붙어있었다. 이상하다. 자세히 살펴볼까 싶어 조금 기울인 고개 위로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뭐하나. 카우보이."


  목소리를 따라 숙였던 고개를 다시 올리자 일리야가 팔짱을 껴고 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빤히 닿아오는 솔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눈빛을 더 매섭게 하며 슬쩍 턱을 치켜들었다. 왜. 직접 입을 움직여 묻지는 않았지만 의미 전달이 확실한 눈빛이었다. 솔로는 순간 구두에 손을 댔느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찾아낸 추적기를 서로에게 던진 게 불과 하루 전 일이었다.

  떼어진 입술이 무어라 소리를 내는 대신 한숨을 내쉬자 일리야의 눈꼬리가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솔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페릴. 부드럽게 굴자고."

  "할 말 있으면 해라."

  "개비 일로 예민한 건 알겠는데 너무 날세우지 말란 소리야."

  "지금 그 말이…"


  이럴 때는 누가 스파이 아니랄까봐 눈치가 빠르다. 화제 돌리는 일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자 솔로는 얼른 의자에 걸쳐두었던 재킷을 집어들었다. 때마침 개비와 그녀의 삼촌이 탄 차량이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킷에 팔을 끼워넣으며 솔로는 느긋하게 미소지었다.


  "일할 시간이네. 난 빅토리아를 만나러 갈테니 자네도 출발해."


  솔로는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재빨리 호텔방 문을 열고 나섰다. 문이 닫힐 때까지 일리야의 대답도,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벌써 따라와도 모자랄 성격이 분명한데. 솔로는 잠시 뒤돌아보았다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발걸음을 떼었다. 확인차 구두코를 다시 한 번 바닥에 찍었지만 여전히 구두는 멀쩡했다. 걸리는 느낌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기분 탓인가. 솔로는 그렇게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2.

  커버가 날아갔다.

  일렁이는 시야는 솔로의 통제를 벗어나있었다. 기어코 빅토리아의 입에서 자신의 본명이 나왔을 때, 솔로는 최대한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최대한 얻어두어야 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사진들을 한 번 스윽 훑어보고나자 숙취처럼 졸음이 밀려왔다. 솔로는 빅토리아가 하는 말에 가볍게 대꾸하며 한 쪽에 놓여있던 쿠션을 집어들었다.

  하나, 둘. 쿠션을 쌓고 누울 자리를 손으로 눌러보던 솔로는 발 끝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잠시 시선을 옮겼다. 낯선 감각이 발 끝에서 발바닥을 타고 흘렀지만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깨어나서, 그에게 시간이 있다면, 확인해볼 일이었다. 솔로는 쿠션을 베개 삼아 소파 위에 길게 누웠다.


  "잘 자요, 나폴레옹."


  반갑지 않은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3.

  솔로는 이를 악 물고 손에 잡힌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손가락마다 연결된 금속 장치로 저릿하다 못해 온몸을 뒤흔드는 감각이 흘러들어왔다. 허리와 머리에 감긴 가죽벨트가 발악하려는 몸을 단단히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내려감은 눈꺼풀 아래로 빛이 번쩍거리는 듯한 환각이 매초마다 반복해서 나타났다. 정신이 제대로 붙잡히지 않는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펄떡거려도 모자란 몸을 덜덜 떨며 입술 사이로 흘러나가려는 신음을 삼키는 게 전부였다.

  끝까지 지켜보지 못해서 안타깝네. 빅토리아는 빈 말을 할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솔로의 죽음을 명령했을 것이다.   그녀의 방식대로 천천히, 음미하듯이. 그렇다면 그가 살아서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잠시 헤아리던 솔로는 고통에 굴복했다. 머릿속을 하얗게 지워내는 기분이었다. 뒤통수가 뻐근해지고 코 끝에서 윗입술을 타고 미적지근한 기분이 들 때서야 루디는 페달에서 발을 떼었다. 참고 있던 숨이 한꺼번에 터지며 저절로 신음이 터졌다.

  연결된 장치들을 모두 떼기 전까지는 자유로울 리 없었지만, 솔로는 숨을 고르는 동안 눈동자를 굴려 문 밖을 쳐다보았다. 옆에서 무어라 떠드는 루디의 말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빅토리아가 왔을 때부터 무장을 하고 움직이던 경비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딱딱하게 굳은 채 옆얼굴을 보여주며 움직이던 때와는 다른 움직임에 솔로는 눈가에 힘을 주었다. 경비는 비틀비틀 옆으로 움직이다 풀린 눈동자로 쓰러졌다. 솔로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눈을 두어번 깜빡이자 이내 익숙한 옷차림의 러시아 사내가 시야에 들어왔다. 페달이 달칵거리는 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떠도 일리야는 여전히 시야에 있었다.

  그제야 확신이 든 솔로는 묶인 상태에서 억지로 뒤척였다. 일리야는 검지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가져다대더니 홀연히 사라졌다. 솔로는 혼자 떠들어대는 루디의 말을 넘겨들으며 간신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묶여있는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하루종일 그를 괴롭혔던 구두가 있었다.


  저 구두를 확인해야 하는데. 거기까지 떠올린 솔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거였군. 생각을 정리한 솔로가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는데. 자네를 보게 되서 정말 기뻐."



요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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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dyie :

2016. 02. 07


* 일리야솔로


맨프엉 전력주제 : 귓속말

w. Edyie



  개비 텔러는 함께 테이블에 둘러앉은 두 사내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녀는 따뜻한 커피잔을 손에 쥐고 한쪽 눈썹을 말아올렸다. 둘 사이 기류가 심상치가 않다. 개비는 이런 날엔 자리를 박차고 나가 홀로 산책하는 편이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애석하게도 날씨가 따라주지 않았다. 그녀는 창밖에서 후두둑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떨어지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슬쩍 젖은 모자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옆자리 의자에 놓인 챙이 긴 모자는 벌써 비를 맞아 촉촉히 젖어있었다. 마음에 들었던 모자였는데. 개비는 한숨을 폭 쉬었다가 때맞춰 들리는 소음에 고개를 들었다. 신문이 팔랑거리는 소리가 개비의 왼편에서 들렸다. 잠깐 신문 사이로 드러난 얼굴이 평화롭다 못해 태평하게 보여서 개비는 저도 모르게 하- 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 소리를 들었는 지 신문 뒤로 사라졌던 얼굴이 신문을 반으로 접어내리고는 왜 그러냐는 눈빛을 보내오자 개비는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그의 반대편이자, 그녀의 오른편에 앉은 남자를 가리켰다.


  "저러다 신문이 찢어지던가, 테이블이 뒤집히던가 둘 중 하나겠어요. 그만 모른 척 해요."


  항상 입던 갈색 자켓을 걸치고 헌팅캡을 눌러쓴 러시아 남자가 그녀의 손 끝에 있었다. 일리야는 개비가 자신을 가리키는 손가락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건너편에서 펼친 신문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의 행동을 모르지 않지만 신경을 쓸 여유가 퍽 없어보이는 자세였다. 개비가 아는 한, 일리야의 문제는 신문 너머에 자리한 인물이 쥐고 있었다. 눈치 빠른 나폴레옹 솔로는 그가 자리를 잡고 앉을 때부터 집요하게 따라붙은 시선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그 눈빛을 마주보거나 무슨 용건이냐고 묻는 대신 정중하게 카페 종업원에게 오늘자 신문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했고, 신문을 받자마자 얼굴을 가려버렸다. 평소의 솔로라면 읽고도 남았을 시간이 지나는 동안 신문이 반절 정도 밖에 넘겨지지 않았으니 명백히 속임수였다.

  흠흠. 솔로는 개비의 매서운 눈빛을 가볍게 넘기며 가라앉은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신문 아래 놓인 그의 물잔을 향해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지만 이번에는 개비가 빨랐다. 그녀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솔로가 쥐고 있던 신문을 낚아챘다. 솔로가 손에 힘을 주기도 전에 짧게 잡고 있던 신문은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개비 앞으로 곱게 접혀 내려왔다. 한순간에 무방비 상태로 드러난 솔로가 개비를 올려다보며 미간을 좁혀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개비는 그제야 개운하다는 표정으로 건너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 위로 동그랗고 작은 주먹이 가볍게 노크하자 일리야가 시선만 옮겨 개비를 바라보았다.


  "이제 잘 보이죠? 알아서 해결해요."

  "고맙군."

  "아, 아침부터 비를 맞았더니 기분이 영 찝찝하네. 씻으러 갈 테니까 즐거운 대화 나눠요."


  개비는 싱긋 미소를 띈 얼굴로 둘을 번갈아보다 옆자리에 두었던 모자를 챙겨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솔로는 상황을 정리하고 빠져버린 그녀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말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거야 원. 가볍게 한숨을 내쉬려고 숨을 들이쉬기 무섭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우보이. 개비가 만들어 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일리야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솔로는 기어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자네가 왜 그렇게 심통이 나있는 지 모르겠군."

  "허. 그걸 지금 말이라고…"

  "내 기억대로라면, 어젯밤엔 이렇지 않았는데 말이지."

  "……"


  뭐라 대꾸하려던 일리야가 입술을 달싹이다 말고 꾹 다물었다. 쏘아보는 눈빛이 수그러들지 않은 걸로 보아 두 배는 속이 뒤틀렸을 게 분명했다. 밤새 그럴싸한 말을 속삭이던 사람이 맞는 지 솔로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이 밝았으니 그에겐 해야할 일이 있었고, 그건 일리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전에. 솔로는 손 끝으로 재킷 매무새를 가다듬고 여전히 조개처럼 입을 다문 일리야에게 다가갔다. 그가 점점 다가갈 수록 일리야의 시선도 조금씩 위로 올라왔다. 속에 담고 있는 불만을 그대로 드러내며 조금 오만하게 치켜든 턱을 바라보던 솔로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반응도 빠르게 일리야는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이윽고 상체를 숙여 그의 귓가에 내려온 솔로의 입술에 집중했다.


  "……-."

  "뭐?"

  "알아들었으면서 뭘 되묻고 그러나. 나 먼저 일어나지."


  일리야는 여전히 눈가에 준 힘을 풀지 않고 솔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솔로는 돌아서기 전에 가볍게 지은 눈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구두 소리와 함께 멀어지는 뒷모습이 꽤나 경쾌해보여 일리야는 솔로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한참을 자리에 앉아 문가를 바라보았다. 허. 기가 막힌 심정에 내뱉을 거라고는 짧은 탄식 뿐이었다.

  말도 없이 아침에 떠난 모양이 얄밉기 짝이 없었는데 하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자네가 귀여워서 그런거니 너무 서운해 말게.' 라니. 일리야는 그 말을 곱씹다 고개를 저었다.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몸서리가 쳐졌다. 그는 테이블 위에 그의 몫으로 놓인 커피잔을 들어 마시다말고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식어버린 커피는 지나치게 맛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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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dyie :

2016. 01. 23


* 일리야솔로

* 결말을 뒤틀었습니다. 캐릭터 사망소재 주의.


맨프엉 전력주제 : 거울

w. Edyie



  일리야는 제 등 뒤에서 넘어온 온기에 몸서리를 치며 눈을 떴다. 짧은 순간 경련과도 같은 떨림이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어둠 탓에 둔감해진 시력이 몸을 휘감은 팔의 존재를 깨닫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일리야는 그 사이 느리게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이윽고 시야에 들어온 익숙한 손을 확인한 순간, 그의 입에서는 무거운 한숨이 터졌다. 일리야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다시 눈꺼풀을 내려감았다. 일리야의 상태를 눈치 챈 솔로는 허리께에 감은 팔에 슬쩍 힘을 주었다.


  "페릴. 일어났으면 잠깐 돌아봐줘도 되지 않나?"

  "…나폴레옹."

  "그거 참 다정한 호칭인데."


  일리야는 어깨 위로 얼굴을 묻는 솔로를 알았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그의 파트너가 눈을 조금 크게 뜨고 장난스런 미소를 걸고 있을 참이었다. 때때로 얄밉기도 했지만 일리야가 좋아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리야는 솔로의 표정을 확인하는 대신 내려감은 눈에 더 힘을 주었다.

  일리야는 아침 일찍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야 했다. 지금은 아직 해가 뜰 기미도 보이지 않는 새벽이었고, 그의 피곤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더 자둘 필요가 있었다. 일리야는 고집스레 모로 누운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상대는 눈치가 빠른 미국의 스파이였다. 솔로는 뻗었던 손을 거두는가 싶더니 허벅지 근처에 힘없이 늘어뜨려진 일리야의 손을 잡았다. 효과는 솔로가 기대했던 만큼 확실했다. 막 잠에 빠지려던 일리야는 눈을 뜨고 움찔거렸다. 그리고 닿았던 손 끝부터 잘게 떨기 시작하더니 손가락을 까딱이기 시작했다. 일리야의 반응에 놀랐는 지 솔로는 재빨리 손을 거두고 잠시 침묵하더니 너스레 섞인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걸어왔다.


  "하하. 뭘 그렇게 놀라나. 손이 닿았을 뿐인데." 일리야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까딱이는 손가락의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페릴? 등 뒤에서 솔로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일리야는 대답을 할 수도, 시야를 돌릴 수도 없었다. 애초에 잠결에라도 대답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일리야는 때늦은 후회를 하며 손가락을 멈추려 애를 썼다. 뜻대로 되지 않자 어둠을 마주한 눈동자가 작게 흔들리는 지 시야가 어지러워졌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기어코 불규칙한 숨소리가 터지자 솔로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어깨에 닿은 손이 슬쩍 그를 뒤로 당김과 동시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일리ㅇ……."

  "그만!"


  윽박에 가까운 외침에 솔로의 목소리가 밀려나듯 사라졌다. 동시에 일리야를 끌어당기던 힘도, 어깨에 닿았던 손도 사라졌다. 일리야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손바닥 안으로 얼굴을 묻었다. 한참을 걸터앉아있자 날뛰던 호흡은 가라앉았다. 그러나 여전히 솔로의 손이 닿았던 손가락은 작은 잔상을 남기며 떨고 있었다. 다정하게 그를 걱정하던 솔로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다행히도 몇 번의 반복을 통해 일리야는 스스로 이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제 기억한 순서대로 움직일 차례였다. 일리야는 고개를 들고 내려감았던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올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 솔로가 누워있던 자리를 '확인'했다.

  솔로는 그곳에 없었다. 일리야가 누웠던 자리는 이불이 눌린 상태였지만 솔로가 있던 자리는 일리야가 눕기 이전 상태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떨리는 손을 뻗어 자리를 짚어보았지만 온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확인'이 끝나자 일리야의 입에서 자조적인 웃음이 터져나왔다.


  나폴레옹 솔로는 오늘 저녁 이곳에 없었다. 처음부터 온 적이 없었다.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은 일리야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눈을 감기만 해도 솔로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옅은 하늘색 셔츠 위로 번져나가던 검붉은 자욱, 얇은 카펫 위로 떨어지던 아버지의 손목시계, 총상을 입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던 나폴레옹 솔로와… 방아쇠를 당긴 총을 내려다보던 러시아 사내, 일리야 쿠리야킨. 모든 조각이 합해져 솔로의 죽음을 만들지 않았던가.

  솔로는 죽어가는 순간까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는 한숨 섞인 웃음을 터트리고는 일리야의 이름을 부르며 쓰러졌다. 발치에 떨어진 손목시계의 유리가 산산히 부서지는 모양이 느리게 재생되었다. 동시에 솔로는 피로 얼룩진 손을 뻗어 디스크를 움켜쥐더니 창 밖을 향해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베이지색 카펫 위로 무너진 솔로가 겨우 시선을 마주한 일리야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일리야가 총을 버려가며 달려갔지만 솔로의 마지막 숨이 한 발 빨랐다. 바닥으로 떨어진 손은 간신히 일리야의 손 끝을 스쳤을 뿐이었다.

  솔로의 죽음 중에 가장 선명하게 남은 그 감각은 이따금씩 일리야를 찾아왔고 환상과 환청을 만들어냈다. 그 때마다 일리야는 버릇보다 심하게 손을 떨었다. 오늘도 그런 날 중에 하루였다.


  일리야는 더디게 떨림이 잦아든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그는 피로가 가시지 않은 눈을 찬 손바닥으로 누르고 있다가 시선을 바로했다. 응접실에 걸려있는 커다란 거울 속에 방 안의 풍경이 비춰지고 있었다. 혼자 쓰기에는 넓어보이는 침대 위로 지친 얼굴을 한 사내가 앉아있었다. 그의 옆자리는 여전히 텅 빈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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