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커플링에 가깝지만 브랫네잇 조금
* 메이즈러너AU
The Pit (for. 연우)
w. Edyie
새벽을 적시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나지막히 흙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겨우 선잠이 든 귓가에 박혀드는 바람에 브랫은 미간을 좁혔다. 성가신 버릇이지만 고칠 방법이 없었다. 소년에게는 비를 멈출만한 능력이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빗소리를 무시할 만큼 청력이 둔감한 편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비오는 밤에는 꼭 한 번 눈을 떠야만 다시 잠들 수 있었다. 눈을 뜨지 않고 버티다가는 되려 아침이 올 때까지 잠들 수 없는 꼴이 나버렸다. 브랫은 점점 또렷해지는 정신을 느끼며 느리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흐릿했던 시야에 익숙한 천장이 들어올 때까지 가만히 누워있다가 슬쩍 고개만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다른 글레이더들은 전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바로 옆 해먹에 자리잡은 레이는 잠버릇 탓에 벌써 반쯤 걸쳐진 상태였다. 저렇게 자놓고는 또 아침부터 어깨가 아프다느니 목이 뻐근하다느니 징징거리지. 망할 잠버릇 좀 고치라고 말을 해도 들어먹을 생각은 없을테고. 브랫은 고개를 작게 내저으며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지만, 브랫이 글레이드에서 제일 키가 큰 소년이었던 탓에 삐걱대는 소리가 짤막하니 울려퍼졌다. 브랫은 해먹에 뭉개듯 대충 몸을 묻으며 빗소리를 들었다.
톡톡톡. 한참동안 귓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빗소리 뿐이었다. 다른 소년들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누워있지만 한 번 깨버린 잠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엔 이렇지 않았다. 소년이 글레이드에 들어온 때, 그보다 조금 지나서까지도 빗소리에 잠이 깨는 일은 없었다. 빗소리에 예민해진 건 순전히 후천적인 탓이었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해도 얼굴을 마주치면 아직도 이따금씩 선명한 기억이 겹쳐졌다가 사라졌다. 환상은 글레이드에서 단련된 소년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도 남을 만큼 강렬했다. 기분이 어땠는지, 정신없이 파고 들던 소리와 손에 닿았던 감촉마저 전부 생생할 정도였다. 브랫은 생각을 덜어내려 애쓰다가 느즈막히 눈을 감았다. 눈 앞에 섬광처럼 번쩍인 영상 탓이 아니었더라면 다시 눈을 뜰 일이 없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늘도 길게 늘어진 기억의 잔상이 브랫을 붙들었다.
브랫은 잠깐동안 숨을 참았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어깨도 숨을 따라 느리게 들썩였다. '젠장. 그냥 내 말 들어!' 절규에 가까웠던 외침이 빗소리와 뒤엉켜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브랫은 작게 욕을 내뱉고 눈을 질끈 내려감았다. 다행스럽게도 다시 잠들 때까지 브랫을 괴롭히는 기억은 나타나지 않았다. 내일 뛰어야 할 구역이 어디였더라. 생각을 갈무리하던 소년은 빗소리를 잊은 채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었다. 글레이드는 여전히 시퍼런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이었다.
* * * * *
네이트가 눈을 크게 부릅 떴다. 브랫이 글레이드에 들어와 1년 하고도 반 년에 가까운 시간을 지내면서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익숙한 눈동자에는 낯설게도 다급함이 서려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비쳐진 두려움을 마주할 때에야 브랫은 일이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제 등 뒤에 무언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확인할 필요는 없었지만 브랫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말하면 몸을 움직이기 위해 어깨를 조금 달싹였을 때, 미로 가득히 목소리가 메아리 쳤다.
"뛰어, 브랫! 뛰라고!"
평소와 다르게 터지듯 내지른 목소리와 기괴한 울음소리가 동시에 브랫을 덮쳤다. 막 돌아서려던 브랫은 재빨리 시선을 바로잡으며 바닥을 박차고 달려나왔다. 뒤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느낌과 역겨운 냄새가 단번에 어깨를 넘어 브랫을 앞질렀다. 벽을 긁는 금속성 마찰음이 점점 가깝게 들려오자 마주 서 있던 네이트는 팔을 멀리 뻗어 들고 있던 장대를 브랫의 뒤쪽으로 집어던졌다.
언제나 이런 상황은 예상하고 있었다고 믿었지만 예상과 현실의 격차는 생각했던 것보다 벌어져 있었다. 갑작스런 변화에 침착했던 두 소년이 한꺼번에 페이스를 잃었다. 뛸 때에는 오직 미로만 떠올리고 다른 건 잊어. 우린 꼭 돌아와야 하니까. 출발 전 단정한 얼굴로 말했던 네이트가 팔을 휘돌리며 브랫을 재촉했다. 모든 게 생경한 풍경 가운데 익숙한 모습이라고는 주변을 높게 둘러싼 빌어먹을 미로 뿐이었다. 브랫은 내딛는 발에 힘을 주었다. "브랫-!" 귓가를 먹먹하게 만드는 고함과 소름 돋는 울음소리가 뒤엉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머릿속을 서서히 물들이는 공포가 집중력을 흐트러뜨렸지만 브랫은 시야에 들어온 네이트의 손을 바라보며 달렸다.
초조한 얼굴로 끝없이 그를 격려하던 네이트가 표정을 바꾼 순간과 브랫이 등 뒤에 느껴지는 질척한 액체를 느낀 건 거의 동시에 가까웠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감각에 브랫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반쯤 돌렸다. 전체가 보이지 않았지만 시선 끄트머리에 들어온 '괴물'의 모습은 발을 멈추게 만들었다. 새빨간 빛이 무척이나 가까운 거리에서 반짝였다. 끝이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입에서 신음에 가까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아. 눈을 깜빡이는 찰나가 그토록 길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눈꺼풀이 전부 들리기도 전에 브랫의 어깨를 잡아채는 손길이 느껴졌다.
"브랫!"
네이트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파고들자 브랫은 눈을 크게 떴다. '어째서?' 바보같은 질문을 하기도 전에 네이트는 브랫을 밀치고는 다른 손에 쥐고 있던 장대를 두 손으로 단단히 움켜쥐었다. 장대 끝은 망설임 없이 그리버의 머리 아래로 찔러넣어졌다. 아까보다 더 높아진 울음소리가 미로를 뒤흔들었다. 네이트는 얼른 장대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고통에 몸부림 치던 철제다리가 요란하게 바닥을 긁다가 곧 잠잠해졌다. 두어번 눈을 깜빡이며 그리버의 움직임을 살피던 네이트가 얼른 뒤로 돌아 브랫을 바라보았다. 소음이 사라진 미로를 간신히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대신했다. 네이트는 더러워진 손바닥 대신 비교적 깔끔한 손등으로 식은땀이 배어나온 이마를 대충 훔쳤다. 그리고 브랫을 향해 터덜터덜 느린 걸음을 옮기며 손을 뻗었다. 브랫은 엉거주춤 바닥에 손을 짚고 일어나려다 말고 네이트 너머에 늘어진 그림자에 시선을 두었다. 네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입을 떼었다.
"뭘 꾸물대고 있어. 어서 일어…."
"네이트, 뒤!"
키에에엑! 브랫의 외침이 울음소리에 파묻혔다. 마주 보던 네이트가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철제 다리가 바닥에 불꽃이 일도록 긁더니 멀지 않은 거리에 있던 네이트의 다리를 잡아채었다. 네이트가 바닥으로 고꾸라지자 그리버는 자리에서 일어나 넘어진 소년의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시커먼 그늘 아래 삼켜진 네이트가 상황을 판단한 때는 그리버의 몸체에서 뻗어나온 날붙이가 그의 다리를 난도질 할 때 즈음이었다.
저들끼리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던 날붙이는 가차없이 네이트의 다리 부근을 그어댔다. 글레이드에서 입고 나온 낡은 바지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찢어졌다. 금세 드러난 다리 위로 상처가 연달아 생기며 붉은 피가 터졌다. 네이트는 다리를 비틀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브랫은 자리에서 튕겨지듯 일어나 그리버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멈춰섰다. 바닥에 흘러내리기 시작한 새빨간 피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가 또다른 소음이 되어 귓가에 웅웅거렸다. 공포에 사로잡혀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동안 간신히 들어올린 손이 눈에 띄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열 걸음. 결코 안전한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리버는 붙잡은 네이트 외에는 관심이 없어보였다. 떨어진 거리에 선 자신도 이토록 두려운데 아까 네이트는 어떻게 했더라. 브랫을 구하겠다고 그리버의 턱 바로 밑까지 파고들었던 소년이 저 괴물의 아래에 있었다. 거기까지 떠올린 브랫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고 애써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눈을 깜빡인 뒤에야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브랫은 네이트가 꽂은 그대로 박혀있는 장대를 발견하고 달려나갔다. 그리버가 네이트에게 집중한 사이, 장대 손잡이를 붙잡은 브랫이 체중을 실어 장대 끝을 뒤틀어 다시 찔러넣었다. 그리버는 고통보다 분노에 가까운 울음을 토해냈다.
귀가 먹먹해지는 기분이 들 즈음 브랫은 얕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손을 떼자마자 날아든 단단한 꼬리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브랫의 몸은 아까 그가 출발했던 곳보다 조금 떨어진 곳으로 곤두박질쳤다. 브랫은 온 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에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도 딱딱한 돌바닥을 움켜쥐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흉물스럽게 생긴 괴물은 자리를 빙글 돌더니 브랫을 향해 꼬리를 치켜들었다. 채찍마냥 뒤로 넘어갔다 빠르게 앞으로 돌아온 꼬리 끝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려왔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그 끝에서 뾰족하고 기다란 바늘이 돋아나는 모양이 보였다. 브랫은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그에겐 저 바늘을 막을 만한 방어구나 무기가 없었고, 도망치기에도 타이밍이 이미 너무 늦었다. 그렇다면 저 바늘은 어디를 뚫어놓을 것인가. 머릿속은 비극적인 상황 탓에 그들을 둘러싼 미로만큼이나 복잡하게 엉켜버렸다.
금방이라도 몸을 들쑤셔 놓을 듯한 기세로 공중을 떠돌던 바늘이 브랫을 향해 다가왔다. 무거운 철제 다리에 바위가 불꽃을 내며 우는 소리가 반복되고 점점 거리가 좁혀졌다. 바닥을 떠받힌 손과 엉덩이가 들썩거리며 물러났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공포에 덜덜 떨리는 손이 본능적으로 몸을 감싸안자 무게중심이 뒤로 무너져 시야가 허공을 향했다. 브랫은 두 눈 가득히 괴물의 흉측한 얼굴을 담으며 숨을 멈추었다.
삐익. 그 때, 귀를 찢을 듯이 높은 소음이 짤막하니 들렸다. 브랫은 그 소리가 죽기 전에 듣는 환청이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그가 기다렸던 가슴을 꿰뚫는 소리 역시 들리지 않았다.
그리버는 잠시 자리에 멈춰서는가 싶더니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브랫이 덩달아 반대편으로 물러났지만 소년을 쫓는 움직임은 없었다. 한껏 품었던 숨이 그제야 터져나와 조용한 미로에는 브랫의 가쁜 숨소리만 맴돌았다. 조심스레 내쉬는 숨소리가 세 번이 되기도 전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버는 마치 두 소년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뒷걸음질 치더니 결국은 뒤로 돌아 높다란 벽을 타고 사라졌다.
브랫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그리버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즈음에야 퍼뜩 고개를 들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나 몇 걸음 뗀 자리에 네이트가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있었다. 허벅지부터 무릎이며 종아리를 가릴 것 없이 생겨난 자상에서 새빨간 핏줄기가 흘러내렸지만, 어디에도 찔린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브랫은 네이트의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바짓단 중 가장 깨끗한 부분을 힘주어 뜯어냈다. 찢겨진 천조각을 가장 상처가 큰 허벅지에 대고 단단히 동여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길게 뻗어 이어진 길을 살피던 시선이 다시 네이트로 향했다.
브랫은 바닥에 축 늘어진 팔을 제 어깨 위로 두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을 잃어버린 다리와 두 사람의 무게 탓에 일어서자마자 휘청였지만 그는 억지로 버티며 발걸음을 떼었다. 가자. 브랫은 가쁜 숨을 내뱉기 바쁜 입 안으로 소리를 삼켰다. 길이 멀지는 않았지만 혼자 둘 몫을 걷기엔 벅찬 길이었다.
해가 지기까지 얼마나 남았는 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미로에서 밤을 새는 일은 겪고 싶지 않았다. 브랫의 머릿속에 그들이 들어왔던 미로의 입구와 가장 가까운 경로가 펼쳐졌다. 상황은 좋지 않아도 착실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두 소년에게 꽤나 도움이 되었다. 몇 번 방향을 돌린 후에야 마주한 미로의 끝에서 브랫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입구 너머로 글레이드가 어렴풋이 보였다. '네이트, 나한테 고마워 해야할 거야.'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러기엔 기력이 부족했다. 브랫은 부축에서 언제부턴가 반쯤 끌려온 모양새가 된 네이트를 다시 고쳐안았다. 그리고 스산한 바람이 불어닥치는 미로를 겨우 두어발 빠져나오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해가 지는 모양을 보니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그래도 돌아왔다.
"브랫!"
귓가에 반가운 마이크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브랫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들의 등 뒤로 닫히기 시작하는 미로가 묵직한 소리를 냈다. 브랫은 문의 경계에 걸친 네이트의 몸을 글레이드 안 쪽에 내려두고 달려온 마이크를 쳐다보았다. 제 몰골이 말이 아닌 모양인지 말을 걸려던 마이크가 브랫의 이름을 부르다 말을 멈추었다. 브ㄹ….
가까이서 들리던 목소리가 멀어지고, 시야가 뱅글 돌았다고 생각할 무렵 브랫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머리에 아릿한 충격이 느껴진 건 다음 문제였다. "다들 얼른 나와! 러너가 돌아왔어!" 시끄러운 외침을 들으며 브랫은 정신을 잃었다.
소년들은 다시 글레이드로 돌아왔다.
* * * * *
시야에 들어오는 탁한 색깔들이 뒤엉켜 어지럽게 번져나갔다. 브랫은 눈꺼풀을 들어올리자마자 시작된 정신 사나운 광경에 도로 눈을 감았다. 며칠을 누워 있었는지 평소처럼 벌떡 일어날 힘이 없었다. '일어났다고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데.' 브랫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소년들이 글레이드에 마련한 의료실에는 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구조였지만, 적어도 낮과 밤은 구분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브랫이 눈을 뜬 건 애매한 시점이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쉬었던 눈이 제기능을 발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빛이 들어왔다. 브랫이 희미한 빛을 가늠하며 시간을 잠시 고민할 때 즈음에야 시야가 제대로 돌아왔다. 브랫은 누운 자세로 서두르지 않고 감각들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서서히 귓가에 빗소리가 들려오고, 이어서 흙냄새가 코 끝에서 터진 것처럼 한번에 느껴졌다. 신중한 소년은 옷 위에 올려진 손가락을 까딱이며 시간을 재고 느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기를 반복하다가 현기증이 가라앉자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가 누워있던 딱딱한 침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른 저녁이라면 시끌벅적할 글레이드가 이따금 바람과 빗방울에 사박거리는 풀소리, 이따금 찰박이는 물소리를 빼면 남는 소리가 없을 만큼 적막했다. 작게나마 웅성거리는 소년들의 목소리는 모두 숨어있었다. 브랫은 지금이 새벽녘일 거라 추측했다. 글레이드의 모두가 잠든 시간. 조금 더 있으면 미로의 문이 열리고, 러너들이 달려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일어날 시간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브랫은 번개라도 맞은 사람처럼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러너. 미로. 네이트. 브랫은 바로 옆 침대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거리에 놓인 나무침대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의료실에는 브랫 혼자 뿐이었다. 네이트는 어디 있지? 불안감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브랫이 기억하는 네이트의 모습은 지금 의료실에 누워있어야 마땅한 부상을 가지고 있었다. 난도질 당한 다리에서 흐르던 새빨간 피와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번갈아가며 눈 앞에 아른거렸다.
설마. 브랫은 마른 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안한 상상따위는 그가 상황을 파악하는 데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침대 아래에 놓인 신발을 찾아 신고 바닥에 내려서자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찌르르한 통증이 타고 지나갔다. 휘청이는 몸을 버티고 선 브랫이 느리게 의료실 문을 밀었다.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사이로 촉촉히 젖은 땅이 눈에 들어왔다. 흙바닥 위에는 무언가 끌린 흔적이 남아있었다. 브랫은 이어진 흔적을 따라 시야를 옮기다 잠시 숨을 멈추었다. 어둑한 어둠 사이로 시커먼 형체가 비를 맞으며 바닥에 웅크려 있었고, 브랫은 한 눈에 정체를 알아보았다. 브랫은 다가가는 대신 나지막히 이름을 불렀다.
"…네이트."
"……."
대답 대신 네이트는 제자리에 멈춰섰다. 후우후우. 숨을 고르며 들썩이는 어깨가 제법 떨어진 브랫의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브랫에게 등을 진 채로 앉아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브랫은 문가에 선 채로 대답을 기다렸다. 거칠던 숨소리가 안정될 즈음에야 네이트가 입을 열었다.
"도와줘, 브랫." 힘에 부쳤는지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피곤을 담고 갈라져있었다. 브랫은 빗 속으로 걸음을 내딛고 네이트의 곁으로 다가가 그를 부축하기 위해 몸을 숙였다. 이미 흠뻑 젖은 옷이 근육이 빠지기 시작한 팔다리에 늘러붙어 있었고, 허벅지에 감긴 붕대 사이로 시커먼 핏기가 돌았다. 브랫은 얼마나 빗속에 있었느냐 물으려던 질문을 삼켰다.
브랫이 자신을 향해 뻗어진 팔을 어깨에 두르고 다리에 힘을 주어 일으키자 네이트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나왔다. 가뜩이나 성하지 않은 몸으로 네이트를 부축하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브랫은 자세가 무너지기 전에 네이트가 깔고 앉아있던 다리를 펼 수 있게 도와주고 제자리에 앉혔다. 네이트는 잇새로 새어나가는 신음을 참으며 붕대 쪽으로 손을 뻗었다. 상처가 터졌는지 젖은 붕대 위로 피가 번져나갔다. 브랫은 놀란 눈으로 네이트를 바라보았다.
당장 네이트에게 필요한 건 의료팀의 응급처치라고 생각한 브랫이 모두가 잠든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일어섰다. '로버트를 불러올게.' 브랫은 머릿속에 담긴 말을 채 꺼내보지도 못하고 갑자기 붙잡힌 팔을 돌아보았다. 자국이 남을 정도로 팔을 억세게 쥔 손이 아이러니하게도 파르르 떨렸다. 희미한 빛 사이로 보이는 보랏빛 입술이 달싹였다.
"날 구덩이로, 데려다 줘."
"뭐?" 브랫은 한 대 얻어맞은 사람과 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항상 제대로 된 말을 늘어놓는 네이트의 말이 맞는 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네이트는 고개를 숙인 채 도리질치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대로는 너무 늦어. 다들 일어나기 전에-"
"거긴 감옥이잖아. 거길 네가 왜 가."
"…우선 데려다 줘."
"네이트."
"브랫. 시간이 없어."
"젠장. 그냥 내 말 들어!"
브랫은 잡고 있던 팔을 털어내고는 네이트의 어깨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젖은 옷감이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시선을 내리깔던 네이트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브랫을 올려다보았다. 얼굴을 마주보았다고 생각하자마자 브랫의 손목에 네이트의 손이 감겨왔다. 눈빛과 손을 타고 전해지는 힘에 브랫은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었다.
불안과 두려움이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브랫이 몇 번 마주한 적 있었다. 그리버에게 찔려 미로로 강제추방 당했던 글레이더들이 몇 명인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그 중에 살아돌아온 소년은 한 명도 없었다. 강제적으로 글레이드에서 격리된 소년들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다가올 결정을 미리 깨닫고 똑같은 눈빛을 떠올렸다.
그 눈빛을 네이트가 하자 브랫은 맥이 풀렸다. 반면, 네이트는 더 절박한 눈빛으로 미끄러지는 브랫의 팔을 붙잡았다. 제대로 힘을 조절하지 못한 탓에 바르르 떨리는 손이 도망치려는 브랫을 옭아매었다.
이건 룰이잖아. 짤막하게 덧붙는 말이 한없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글레이드에 정해진 규칙은 적지 않은 죽음과 사고를 겪으며 하나 둘씩 쌓아올린 결과였다. 그 중에 그리버에게 찔려 변이가 시작된 글레이더를 어떻게 해야하는 지도 정해져 있었다. 추방 전까지 구덩이에 가둔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 지켜지는 규칙 중 하나였지만 브랫은 부정했다.
절박한 눈빛을 피한 시선이 붕대 아래 감춰진 다리로 향했다. 상처부위가 넓었던 만큼 허벅지부터 무릎께를 감은 붕대 아래로 드러난 다리에는 어떠한 징조도 나타나지 않았다. 브랫은 증거도 없이 상처를 입었다는 이유로 그를 구덩이에 가둬야 하는 지 고민했다.
파랗게 질린 입술이 작게 달싹거리며 브랫을 설득했다. 브랫. 불리는 이름이 제 것임에도 낯설게 들려왔다. 브랫은 다물린 입술에 힘을 주었다. 네이트에게서 넘어온 감정이 뒷목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외면하기에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였다. 브랫은 눈을 감고 낮은 한숨을 토해냈다.
네이트는 말이 없었다. 대신 브랫이 눈을 뜨기 직전, 그 짧은 사이에 손을 뻗어 브랫의 어깨 위에 두었다. 다독이는 손길이 차디찬 비 때문인지 따스하게 느껴져 브랫은 상체를 웅크렸다. 미로에서 그를 구해주었던 네이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비참한 기분이 다 낫지 않은 몸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그를 이렇게까지 내몰았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울컥 치고 올라왔다. 브랫은 천천히 네이트의 등 뒤로 팔을 뻗어 며칠 새에 야윈 몸을 감싸안았다. 의젓한 소년은 브랫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기댈 수 있게 품을 열어주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브랫, 괜찮아."
밀려난 손으로 등을 토닥이던 네이트가 브랫을 떼어내며 덧붙였다. 다시 마주친 시선에는 브랫이 늘 봐오던 눈빛을 가진 소년이 자리했다. 브랫은 눈을 두 번 깜빡이는 동안 마음을 굳혔다. 그는 네이트가 바라는 대로 도와줄 생각이었다. 네이트를 구덩이에 데리고 가겠지만, 그건 추방을 준비하는 기간이 아닐 것이다. 밑바닥에 깔려있던 불안감이 확고한 믿음으로 바뀌었다. 변화는 여태까지 그를 이끌었던 눈빛에서 시작되었음을 브랫도 알고 있었다.
브랫이 먼저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혼자 일어서기가 힘들었는 지 네이트는 뒤척이다가 브랫을 올려다보았다. 허공으로 떠오른 손을 붙잡은 브랫이 맞잡고 힘을 주었다. 숙여진 고개를 네이트의 팔 아래로 밀어넣으며 허리를 세우자 둘은 완전히 일어섰다.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두 소년은 누가 뭐라하기도 전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서서히 약해진 빗줄기와 구름 사이로 희뿌연한 햇볕이 비쳤다. 글레이드에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 * * * *
"브랫. 일어나."
익숙한 목소리가 나지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늘을 그리며 내려앉은 손이 어깨를 움켜쥐고 흔들었다. 강하진 않지만 해먹을 흔들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제대로 눈이 떠지지 않아 브랫은 일단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브랫은 먼저 손을 뻗어 해먹을 붙잡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제야 눈꺼풀 위로 엷은 햇살이 주홍빛으로 번쩍이며 들어왔다. 브랫은 시린 눈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손바닥 안으로 얼굴을 묻고 마른 세수를 했다. 여전히 햇볕은 부담스러웠지만 지체할 만큼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브랫은 느리게 눈을 뜨며 옆에 선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소년이 햇살을 등 지고 자리한 탓에 서 있는 이의 얼굴을 확인하는 데까지 한참이 걸렸지만, 브랫은 이미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기억을 되짚던 꿈 속에서 본 얼굴이 점점 선명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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