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ration Kill Fan Fiction
이별통보
w. Edyie
- 레이,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 밖에... 미안.
삑.
- 레이,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 밖에....
레이는 생각없이 다시 듣기 버튼을 누르다 말고 자신이 몇 번째 이 음성메세지를 듣고 있는 지 속으로 세어보았다. 10번. 10번이었다. 기계적으로 누르던 손가락이 이제 11번째 반복청취를 위해 버튼 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눈 앞에 놓인 재떨이에 지긋이 눌러 뭉개던 레이는 그제서야 문득 떠올렸다. 왜. 내가 왜.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답을 떠올리려 노력해도 금방 정확한 해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늘 하던대로.
"씨발."
레이는 거기까지 떠올리고서 욕을 내뱉으며 수화기를 던져버렸다. 손을 떠난 수화기가 거칠게 튕겨져나갔다가 바닥에 처박혀 대롱대롱 흔들렸다. 하던대로, 라니. 이 엿같은 꼬라지에 나온다는 답이 '하던대로'?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오는 답이었다.
레이는 그의 목소리를 참 좋아했다. 그를 가만히 안고 토닥이는 기분이 들게 하던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자기처럼 경박한 언어를 쓰기보다는 조금 재수없지만 바르고 고운 말을 하던 목소리를 참 좋아했더란다.
하지만 그것도 다 옛말이었다.
헤어졌으니 이젠 옛말이 될 참이었다. 어제 레이가 참 좋아하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뒤, 맞은편에 앉아있던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레이, 할 말이 있어.'
그렇게 운을 떼는 순간 레이는 직감적으로 그가 평소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애써 무시하려고 노력해보아도 발 끝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한기와 같은 기분이었다. 레이는 무슨 말이냐는 대답 대신 눈을 꾹 감았다 뜨고 그를 마주보았다. 눈동자가 흔들렸을 지, 아니면 무심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을 지는 레이도 알 수 없었다. 레이는 약간 시선을 내리고 그의 입술에 집중했다. 하아. 한숨을 내뱉은 붉은 입술이 천천히 달싹였다.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이별의 말들로 인해 레이는 철저하게 무너져내렸다.
그는 레이에게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항상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탓에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투정을 부리던 레이를 모르지 않을텐데, 그 말을 제일 먼저 꺼냈다. 뒤이어 그는 멀리 떠난다는 소식을 전하고, 행복하길 바란다는 소리를 했다. 그러면서 너무 뻔한 소리를 했냐며 어색하게 웃었다. 레이가 멍해진 사이 그는 그렇게 자기 할 말을 다 전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에는 그만하자는 말도, 끝이라는 말도 없었다. 그러나 레이는 그가 한 말 아래에 그런 뜻이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바보도 아니었다. 마지막을 뜻하는 말은 너무 슬프잖아. 그래서 싫어. 언젠가 그가 한 적 있는 말을 떠올리며 레이는 피식 웃어버렸다.
'이제 보니 존나 잔인한 사람이네요. 자기가 싫어하는 말은 쏙 빼놓고, 레이가 싫어하는 말만 했어.'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흘렸는 지는 아직도 떠오르지 않았다. 레이는 그저 그의 태도에 조금 화가 나기도 했고, 어느 정도 어이가 없기도 했으며, 많이 슬프기도 했다. 그런 감정을 어떻게 한꺼번에 풀어야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말이 먼저 튀어나갔다. 대충 꿰어입은 청바지를 슥슥 손으로 문지르던 레이는 갑자기 담배가 간절해졌다. 멀쩡히 밥을 먹다가 손이 떨리는 건 니코틴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레이는 눈을 꾹 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밀리는 의자소리가 시끄럽게 식당 안에 울려퍼졌다.
'그 동안 못난 레이새끼 받아주느라 고생 많았어요. 잘 가요. 지금 담배 안 물면 뒈질 거 같아서 먼저 가볼게요.'
대답은 듣지 않았다. 레이는 뒤로 돌아 눈을 뜨고 성큼성큼 가게를 빠져나와 길을 걸었다. 마지막으로 본 그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끝내 레이를 붙잡지 않았다. 씨발, 나쁜새끼. 레이는 욕을 내뱉으며 발 닿는대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고나서 식당도, 그의 눈동자도 떠오르지 않을 무렵이 되어서야 자리에 멈춰섰다.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찾아온 오한에 온 몸이 덜덜덜 떨려왔다. 레이는 사람들이 간간히 지나다니는 길 한구석에 주저앉았다. 자꾸 손에서 미끄러지는 담배를 겨우 입에 물고 불을 붙이자 그제서야 떨림이 조금 멈추는 듯했다. 거봐, 레이는 천재라니까. 금단현상으로 손이 떨린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허공에 연기를 후욱 내뱉는데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러자 잦아들었던 떨림이 더 심해졌다. 레이는 담배도 집어던지고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묻었다. 눈물이 배어든 청바지가 축축한 한기를 여과없이 피부로 전달했다. 한참을 그러고 앉아있는데 겉옷 주머니에서 잘게 진동이 울었다. 우우웅. 우우웅. 아무리 무시해도 계속 울리는 진동에 신경질적으로 휴대폰 액정을 노려본 레이는 할 말을 잃었다. Iceman. 레이는 숨을 두어번 고르고 전화를 받았다.
'씨발, 왜요.'
'너 왜 그러고 있어.'
'...내가 뭐요.'
'왜 길가에 처앉아서 궁상 떠냐고. 못난 새끼야.'
'무슨 개소리예요. 내가 왜....'
레이는 변명을 하려다 말고 길 건너편에 서 있는 브랫을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Fuck. 브랫이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이 쪽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꼴이 보였다. 걸려도 어쩌면 저렇게 귀신같은 새끼한테 걸렸을까. 그런 헛생각을 하며 레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브랫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그는 먼저 건너오지도, 레이에게 뭐라고 소리치지도 않았다. 그저 그대로 서 있던 자리에서 레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레이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툭툭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고 눈가를 슥슥 문지르자 얼어붙은 눈물 탓인지 아릿한 기분이 들었다. 비척비척 지나가는 차를 피해가며 길 건너에 도착할 때까지도 브랫은 가만히 서있었다. 혹시라도 눈이 부었을까 레이가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지 않았더라면 그 상태가 계속 이어졌을 판이었다.
'레이.'
브랫이 나지막히 레이를 불렀다. 왜요. 레이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춥다. 집에 가자.'
'알았어요. 브랫도 알아서 가요.'
'병신. 또 어디서 쓰러져 울 지 알아서 혼자 보내냐.'
'장난해요? 됐어요. 존나 꺼져요.'
'닥치고 앞장 서.'
'아, 좀. 브랫!'
레이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쏘아보아도 브랫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레이가 앞장 서서 걸음을 내딛었고, 느린 걸음으로 브랫이 따라걸었다. 거리에서 20분 정도 걸리는 레이의 아파트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한 동행만이 두 사람 사이에 존재했다. 브랫은 아파트 입구에 도착해서야 말을 걸어왔다. 그마저도 '씻고 자라'라는 말이 전부였다. 그는 그대로 돌아서서 밤길을 걸었고, 레이는 쿵쾅거리며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잠이 들었다.
중간에 깨어나지도, 꿈도 꾸지 않은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나니 집전화로 음성메세지가 남겨져 있었다. 발신인은 어제 레이에게 이별을 통보했던 그 목소리였다. 사람 속을 뒤집어놓을 때는 언제고 태평하게 음성메세지라니. 레이는 울컥해서 수화기를 집어들고 번호를 누르다 말고 도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수화기를 들었을 즈음, 그는 음성메세지를 10번이나 반복해서 듣고 있었다.
병신도 이런 병신이 또 있을까. 레이는 소파에서 일어나 테이블 모서리에 매달린 수화기를 지나쳐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그나마 깨끗한 컵에 가득 쏟아붓고 그대로 입에 털어넣었다. 그마저도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느껴지는 옅은 비릿함에 인상을 쓰고 싱크대에 반 이상을 뱉어버렸다. 턱 아래로 흘러내린 우유를 대충 손등으로 슥슥 닦아낸 레이는 싱크대 앞에 주저앉았다.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는 다시 밀려오는 짜증에 어쩔 줄을 몰라하며 두 손으로 뒷통수를 감싸안았다. 딱히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감정이 난폭하게 뒤섞여 머릿속에 맴돌았다. 또 다시 울음이 왈칵 쏟아져나왔다. 그렇지만 울음소리는 새어나오지 않았다. 레이는 이를 악 물고 소리를 집어삼켰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답답함에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소리내어 울고 싶지 않았다.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레이는 웅크려앉아 울었다. 꾹 쥔 주먹이 바닥에 내려꽂힌 채 지난 밤처럼 부들부들 떨려왔다. 으, 으. 레이는 그렇게 울음을 소리없이 토해내었다. 아마 부엌문 앞에서 목소리가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하루종일 그러고 있을 지도 몰랐다.
"레이."
익숙한 목소리에 레이는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흐르던 눈물을 아무렇게나 닦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부엌문 쪽에 브랫이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어젯밤과 똑같아 레이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불안정하던 호흡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어제야 그렇다쳐도 오늘은, 씨발, 어떻게 왔어요? 날이 선 레이의 질문에 브랫은 담뱃불을 붙이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물어봤어."
"하, 그렇다고 브랫한테 가르쳐줬어요?"
"응."
"끝까지 개새끼네. 진짜."
레이는 그가 좋아했던 짙은 초록빛 눈동자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턱 밑에 방울져있던 눈물이 고갯짓에 따라 흔들리다 부엌 바닥으로 떨어졌다. 레이는 대충 주변을 둘러보다가 브랫을 향해 손을 털어보였다.
"애써 왔는데 어떡하죠. 존나 상황이 좆같아서 먹을 게 하나도 없는데."
"레이."
"나가서 먹을래요? 그러려면 씻어야 하는데 괜찮으면 기다려...."
"레이."
"그렇게 이름만 부르지 마요!!"
폭발. 레이는 악에 받혀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 지 깨달았다. 브랫은 눈 하나 깜짝않고 여전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레이는 시선을 피하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젠장. 짓눌린 입술 사이로 가라앉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브랫은 그런 레이를 기다려주겠다는 듯 다시 말이 없었다. 레이는 꾹꾹 눌러 담아왔던 말을 느리게 풀어냈다.
"힘들어요, 브랫."
"그래."
"힘들어서, 진짜, 죽을 거 같아요."
"알아."
"그럼 울어도 돼요?"
브랫에게 허락을 받을 이유는 없었지만 레이는 그냥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리고 브랫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응, 하고 대답해주었다. 대답을 듣기가 무섭게 레이는 가리고 있던 손을 떼어내고 마음놓고 울기 시작했다. 담담하던 표정도 한순간에 일그러졌으며, 커다란 눈망울에도 눈물이 가득 맺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처음에는 이를 악 물고 시작된 울음이 점점 크게 번져나가 레이는 결국 브랫을 앞에 두고 서러운 아이처럼 엉엉 울어제꼈다. 레이의 모든 감정이 녹아든 울음소리가 부엌을 가득 메우고 거실까지 퍼져나갔다. 울음은 작아졌다 커졌다를 반복하다 레이가 거의 탈진상태가 될 즈음에서야 잦아들었다. 그리고 그 울음소리가 멈출 때까지 브랫은 레이의 곁에서 말없이 담배만 태울 뿐이었다. 듣는 사람마저 기묘한 슬픔에 빠져들만한 축축한 어느 오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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