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정붕괴. 캐붕 주의.


취중진담

w. Edyie


"하하하… 저승!"

"그냥 조용히 가자."

"야아. 내가 술도 샀는데 너무, 어, 각박하게 구는 거 아니야?"


그게 문제지. 내가 너랑 술을 마신 게 문제야. 왕여는 목 끝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키며 어깨에 두른 이를 끌어당겼다. 김신은 평소 짓고 있던 무표정 따위는 잊은 마냥 환하게 웃으며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만 보면 술을 한 궤짝 두고 마신 사람 같았으나 실상은 오늘도 맥주 두 캔이 전부였다. 맥주 두 캔. 두 병도 아니고 두 캔.


앉아서 마시기 시작할 때는 자신있게 오늘은 평소와 다르다고 하더니만, 반쯤 남아있던 두 번째 캔을 한 번에 털어마시는 꼴을 보자마자 아차 싶었고 기어코 김신이 흥에 겨워 손에 검을 쥐는 순간에는 그의 일생에 실수의 한 획이 또 그어지는 결정이었다고 후회했다. 그는 술에 취한 도깨비가 그러고도 여전히 술을 탐낸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가락을 까딱여 아직 남아있던 제 몫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일어나." 왕여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공원 의자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도깨비의 어깨를 슬며시 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집에서 마실 걸. 뭐하자고 덕화를 피한다고 공원까지 나와서 고생을 자처한 걸까. 그는 터져나오는 한숨을 꾹꾹 눌러담으며 손을 뻗는 도깨비를 피해 뒤로 물러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엉덩이를 밀며 바짝 다가선 김신은 고개를 숙이고도 용케 왕여의 옷자락을 손에 쥐었다. 같이 가아. 느리고 길게 늘어지는 말꼬리가 그의 상태를 말해주는 걸 어쩌겠나. 왕여는 한참동안 망설이며 옷을 이리저리 틀며 도깨비의 손을 떼어내려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결국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술에 잔뜩 취한 도깨비를 들쳐업고 귀가. 몇 차례 손을 들었다 내리기를 반복하던 왕여는 도깨비의 한 쪽 팔을 길게 늘어뜨린 뒤 그 아래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얼른 일어나, 도움 안되는 도깨비. 어느 한 부분도 곱지 않게 내뱉은 말이었으나 퍽 기분이 좋았던 김신은 순순히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떼었다.


그 후로는 쭉 이 상태였다. 자정이 넘을 때까지 잠 못 이루던 두 불멸자가 함께 나온 탓에 시간은 한참 이른 새벽이었고 근처를 지나가는 인적은 드물었다. 대화소리와 끌리는 발소리를 제외하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새벽이기도 했다. 김신이 떠드는 소리만 아니면 정말… 평안한 밤이었을텐데.

어깨를 두르고 길게 늘어진 팔이 자꾸만 밀려내려가고, 만취한 도깨비의 걸음은 평소의 배는 헤매고 느린 통에 왕여는 터져나오는 한숨을 참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한 결정이었으나 어쨌거나 이 동행에는 김신이 취하지 않았더라면 불필요하고 불편한 스킨십이 존재했다. 왕여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가 앙 다물기를 반복하며 소리로 만들지 않은 욕을 삼켰다. 축 늘어져 걸음을 따라오던 도깨비는 실없는 농담을 이따금 늘어놓다가 입을 다물었다.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뒤로 젖힌 김신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재미 없어."

"대꾸할 기운도 없으니까 제대로 좀 걸어라."

"어찌 이리 무정해."

"무정한 건 내가 아니고 대책없이 취해버린 도깨비겠지. 반대였으면 네가 나를…"

"어허. 모르는 소리."

"무슨…야, 야!"


잔뜩 꼬인 혀를 쯧쯧 차던 김신이 갑자기 몸을 비트는 바람에 왕여는 두르고 있던 팔을 놓쳐버렸다. 부축도 없이 무릎에 손을 대고 몸을 숙인 김신이 크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 한숨처럼 길게 늘어지는 숨이 뱉어낸 주인을 닮아있었다. 다시 데려가기 위해 손을 뻗은 왕여는 마주친 눈빛이 가진 변화에 동작을 멈추었다.

그것도 잠시, 또렷한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던 순간은 3초도 가지 못하고 원래대로 스르륵 무너졌다. 그럼 그렇지. 술이 이렇게 일찍 깰 리가 없는데. 왕여는 멈추었던 손을 휘저으며 손짓했다. 김신은 웅크리고 있던 몸을 반쯤 일으키다 말고 비틀거렸다. 왕여는 이제 그만하라는 투로 쏘아붙였다.


"장난 그만해. 힘드니까."

"나도 똑같이 할 거란 소리야."

"뭘."

"이 상황."

"앞뒤 잘라먹지?"


됐고 가던 길이나 가자. 왕여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 사이에 딱 숨 한 번만 들이키고. 그러나 뒷말은 끝내 소리가 되지 못했다. 숨을 들이키는 찰나. 그 짧은 시간동안 김신은 생각지도 못한 말로 왕여의 말문을 막아섰다.


"그대는 나의 벗이라네."

"도깨비."

"그러니 나도 똑같을 거란 소리지."

"…허."


한껏 취한 주제에 늘어놓는 말이 나쁘지 않았다. 다만 술김에 하는 말일지언정 저렇게 듬직할 일은 뭔가. 잠시 고민하던 왕여가 헛웃음을 내뱉자 김신은 힘없이 넘어가는 고개를 끌어다가 다시 눈을 마주쳤다. 하하하. 소리내어 웃는 모양이 우스워 마주보던 왕여마저 웃음을 터트렸다. 왠지 오늘도 도깨비에게 넘어간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렴 어떻냐는 생각이 바짝 뒤를 따라붙었다.

생각을 빠르게 정리한 왕여가 황급히 입술을 말아물었다. 아, 웃으면 안되는데.

Posted by Edyie :